남부선 참혹한 전쟁, 중부선 광란 파티…레바논의 두얼굴

입력 2024-08-28 10:57
남부선 참혹한 전쟁, 중부선 광란 파티…레바논의 두얼굴

이스라엘-헤즈볼라 충돌로 남부 국경지대 초토화

다른 지역은 평화로운 일상 '극과 극'…"강력한 중앙정부 부재 탓"



(서울=연합뉴스) 김상훈 기자 = "디스토피아 국가에서는 행복을 붙잡아야 해요"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카프르데비안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루나 카라메(26)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에서 패션업에 종사하는 그가 휴가 동안 머무는 카프르데비안은 해발고도 1천200m의 고지대로, 중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며 여름이면 고온다습한 레바논의 더위를 피하려는 부유층들로 붐빈다.

올여름에도 이곳에서는 불꽃놀이와 풀 파티가 끊임없이 열리고 테이블 예약 비용만 100달러(약 13만원)가 넘는 인근 절벽 근처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칵테일과 시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베이루트에 사는 드래그퀸(여장남자) 라티자 봄베(27)는 "사람들은 마치 지상의 마지막 파티인 것처럼 춤을 춘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만의 저항 방식일 수도 있고 트라우마를 놓아주는 방식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새벽 이스라엘군이 무려 100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레바논의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시설을 초토화했지만, 카프르데비안의 호화로운 일상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했다.

반면 이곳에서 남쪽으로 불과 50마일(약 80㎞) 떨어진 레바논 남부 국경지대의 모습은 딴판이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가자 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지지하며 이스라엘과 무력 대치하면서, 남부 국경지대는 전쟁 폐허로 변했다.

2006년 전쟁 이후 근 20년 만에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가장 치열한 무력 공방이 11개월 가까이 이어지면서 500명 이상(대부분 헤즈볼라 대원)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헤즈볼라의 무력 개입으로 이스라엘 북부에서도 약 6만명의 주민이 10개월 넘는 피란 생활을 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도 그동안 방어적 대응을 이어온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손보기 위한 레바논 침공 계획과 훈련까지 마친 상태다. 미국이 주도하는 외교적 해결 노력이 실패로 끝났다는 결론이 나면 이스라엘군은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들이닥칠 수 있다.

곧 양측간 전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장이 고조된 상태지만, 그런 긴장감은 이스라엘의 공습이 집중된 국경 근처에만 존재한다.

양측간 무력 공방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해 10월 9일 국경에서 불과 2마일(약 3.2㎞) 떨어진 베이트 리프의 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농부 하페즈 무스타파(47)는 "전쟁이 국민을 둘러 갈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남부지역 사람들뿐인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집에서 불과 15마일(약 24㎞) 떨어진 티레에 머물러 온 그는 이곳에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함께 피신했던 두 사촌 형제들이 티레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급등한 주택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해 고향 마을로 돌아간 뒤 이스라엘군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말도 전했다.

일부 피란민들은 이번 무력 공방의 피해 반경이 계속 늘어나고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두려워하고 있다.

베이트 리프에서 피란 나온 농부 무스타파 이브라힘 사이드(54)는 "2006년 전쟁 때 형제가 죽고 그의 집도 무너졌다.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은 평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경에서 약 40㎞ 떨어진 수도 베이루트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이미 베이루트 외곽에는 두 차례나 이스라엘군의 표적 공습이 있었고, 이에 따라 지난 1월 초에는 하마스 서열 3위인 알아루리 정치국 부국장 등이, 지난달 31일에는 헤즈볼라 최고위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가 사망했다.

또 최근에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주기적으로 베이루트 상공을 저공 비행하며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이처럼 레바논의 상황이 극과 극으로 갈라진 건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온 종교적 갈등과 분열 그리고 이런 와중에 벌어진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라는 시각도 있다.

레바논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장기 내전을 마무리하면서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위한 합의에 따라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 독특한 권력분점 체재를 도입했다.

이런 종파 간 권력분점 시스템은 정치권 및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낳았고 결국 중동에서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인 레바논을 위기로 몰아갔다.



2019년 본격화한 레바논의 경제 위기는 코로나19 대유행, 2020년 베이루트 대폭발,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겪으면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현지 화폐 가치는 98% 이상 폭락했고 극심한 외환 위기 속에 무역도 위축되면서 은행에 맡겨둔 예금마저 인출할 수 없게 된 주민들은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더욱이 정파 간 합의 불발 등으로 대통령 등 주요 지도자를 선출하지 못한 채 국정을 떠맡은 과도정부는 전기 등 필수 서비스조차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레바논 여권 실세이자 정부군보다 규모가 큰 군대를 보유한 헤즈볼라는 특히 남부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인트조셉 베이루트대 역사학과장인 크리스티안 타우텔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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