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다시 울려퍼지는 힐빌리의 노래…더 강해진 트럼프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논설위원 = 우리로 치면 '흙수저 탈출기'라고 할만한 『힐빌리의 노래』는 1990∼2000년대 미국 오하이오주 철강 도시인 미들타운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 등에서 저가의 철강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AK스틸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일터를 잃고 실업수당 등에 의존하는 저소득·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이 느끼는 경제적 박탈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뒤 벤처기업가로 성공한 저자는 워싱턴 주류 정치가 간과한 이들의 '정치적 분노'를 읽었다. 2016년 대선을 다섯 달 앞두고 출간된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보여줬다. 상원의원까지 된 저자 J.D. 밴스는 이제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됐다.
올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4년 전 대선 패배 직후부터 "정권을 도둑맞았다"며 끊임없이 진영정치에 몰두하던 트럼프가 '통합'을 화두로 들고나온 것은 분명 생경하다. 8년 전 그토록 때리던 히스패닉과 흑인 등 유색인종을 향해서도 손을 내밀고 있다. 18일(현시지간) 수락 연설에서는 "미국의 절반이 아닌 전체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불화와 분열은 반드시 치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재집권을 향한 선거 전략상의 변화에 가까워 보인다. 2020년 대선과 2022년 중간선거를 거치며 진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트럼프가 '진영 +α'의 새 집권연대를 구축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많다. 트럼프의 정치는 여전히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데서 보듯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의제를 구현하는데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숨은 권력 집단인 딥스테이트(Deep State)를 해체하는 걸 공공연한 목표로 내걸고 있다. 당선을 기대 않다가 덜컥 백악관에 들어갔던 2016년과는 달리 집권계획이 가일층 치밀해지고 정책 추진력도 훨씬 더 강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주목할 점은 돌아온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더욱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우선 진영 정치를 통해 기득권에 찌든 공화당을 자기 입맛대로 개조해놓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당 전국위를 충성파에게 맡긴 데 이어 하원과 상원도 조직적으로 장악해 들어갔다. 2021년 1·6 의사당 난입 사건은 탄핵 위기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도리어 트럼프를 중심으로 진영을 결속시켰다. 2023년 10월 트럼프에게 충성하는 공화당 강경파의 반란으로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축출된 사태는 '트럼프화'된 공화당의 현주소를 똑똑히 보여줬다. 이제 트럼프 반대편에 서서는 공화당 내에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해 2기 내각을 구성한다면 모조리 충성파로 채울 것이란 전망이 높다. 트럼프는 당초 1기 내각을 각 분야의 명망가나 엘리트 그룹으로 채웠지만 결국 이들이 자신의 어젠다를 방해했다고 보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존 켈리, 제프 세션스, 게리 콘, 허버트 맥매스터, 렉스 틸러슨 등이 딥스테이트로 지목됐다. 당과 내각 모두 미실현된 MAGA 의제를 추진하는 전진기지로 탈바꿈될 공산이 크다.
"미국이 돌아왔다"(조 바이든). 2020년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했을 때만 해도 미국 정치가 잠깐의 일탈을 끝내고 정상궤도로 돌아왔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트럼피즘은 죽지 않았고, 더 강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지치고 '정치적 올바름'에 신물이 난 보통 사람들, 그리고 녹슨 제조업 지대에서 상실감에 젖어있는 수많은 '힐빌리'들에게 트럼프만큼 매력적으로 비치는 정치인이 없을 법하다. 재임 중 탄핵 위기와 4개 형사사건에 91개 혐의, 의사당 난입과 같은 반민주 폭거에도 트럼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어쩌면 오는 11월 대선을 거치며 우리가 목도하게 될 미국은 냉전기 자유민주주의와 국제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민 제한, 제조업 재건, 해외 개입 축소 등 미국 우선주의 어젠다를 기치로 빗장을 걸어 잠그는 고립주의 미국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이는 한국 외교에도 커다란 리스크이자 도전임이 분명하다.
rhd@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