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노예 후손들이 노예 착취 가문에 보상하는 꼴"
바베이도스, 노예 소유 英가문 후손에게서 농장 매입 추진
현지 여론 "정부, 한 푼도 지불해선 안 돼…나쁜 선례"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 정부가 현지 농장 소유 가문의 후손인 영국인으로부터 땅을 '매입'하겠다고 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과거 노예 착취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지는 못할망정 돈을 주고 땅을 산다는 게 말이 되냐는 취지다.
보도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정부는 영국 보수당 리처드 드랙스 의원이 현지에 소유한 250헥타르 규모의 농장 가운데 21헥타르(축구장 15개 면적)를 매입해 주택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매입 금액은 320만 파운드(약 51억원)로 추산된다.
드랙스 의원은 부친으로부터 바베이도스 농장을 상속받았다. 영국 의회에서 가장 부유한 의원 중 한 명인 드랙스 의원의 재산은 최소 1억5천만 파운드(약 2천500억원)로 추산된다.
인구 30만 명가량의 섬나라 바베이도스는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7∼19세기 흑인 노예들이 바베이도스로 대거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지금도 인구의 90%가량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다.
1966년 11월 30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으나 영연방 국가로 남아 영국 여왕을 군주로 섬겼고, 오랜 식민생활로 영국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리틀 잉글랜드'로 불리기도 했다.
2000년 전후부터 공화국 전환을 위한 논의를 이어오다 독립 55년 만인 2021년 11월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드랙스 가문 역시 17세기 바베이도스에 건너가 흑인 노예를 부리며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해 부를 쌓았다. 드랙스 가문은 자메이카에도 노예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가 18세기에 매각했고, 노예무역에 쓰인 배도 최소 두 척 갖고 있었다.
바베이도스 정부는 주택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토지 매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드와이트 서덜랜드 주택부 장관은 "시장 가치를 기준으로 한 매입 절차로, 토지 소유주에게 보상하는 건 당연하다"며 "이 땅이 드랙스 씨의 소유지만, 이건 배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주택 사업일 뿐"이라고 말했다.
영국 식민 통치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이들은 당장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바베이도스 시인이자 해당 토지 인근에서 자란 에스터 필립스는 이 거래는 "말도 안 되는 행위"라며 "이는 희생자들의 후손이 노예를 부린 이의 후손에게 보상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드랙스 의원)는 자신을 더 부유하게 만들 게 아니라, 바베이도스인들의 희생에 대한 대가로 이 땅을 우리에게 배상금으로 넘겨야 한다"며 "바베이도스인들은 이 거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베이도스 국가 배상 태스크포스 위원장인 트레버 프레스코드 의원도 "노예제는 반인륜적 범죄로, 정부는 이 땅에 한 푼도 지불해서는 안 된다"며 "이 문제는 바베이도스뿐만 아니라 카리브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부에 "우리가 그와 배상 문제로 협상 중인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상업적) 거래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드랙스 의원은 이와 관련한 가디언의 논평 요청을 거부했다.
과거 그는 노예무역에서 자기 조상들이 한 역할에 대해 "깊이깊이 유감스럽다"면서도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오늘날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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