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2년 키이우에서] "익숙해진 듯 하지만 그렇진 않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키이우까지 16시간 버스로 입국
"푸틴이 쏜 미사일 날아다니지만 여전히 우린 키이우에"
(바르샤바·키이우=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하늘길은 여전히 막혀 있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입국하려면 육로가 유일한 통로다.
전쟁 발발 2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17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 옆의 버스터미널에는 키이우, 르비우, 드니프로 등 우크라이나 주요도시로 향하는 버스가 분주히 드나들었다.
공항 입국장은 활기찼지만 불과 100m 떨어진 이곳 정류장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은 바위 같았다.
동료들과 짐을 챙기던 볼로디미르 씨는 "리비우에서 민간 항공 영역 일을 하는데 비행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이니 계속 정비 일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만 2년이 된 전쟁을 묻자 "사람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면서도 "아직은 러시아와 협상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을 것"이라고 했다.
단기 출장을 마치고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의 집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던 크리스티나(24) 씨는 3주 전 약혼반지를 뺐다며 빈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러시아가 침공해오던 2년 전 그날 남자친구는 입대해 전장에 나갔다. 몇주 뒤 탱크 공격에 다쳐 전역했는데 이후 줄곧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크리스티나는 "그와 잘 지내보기 위해 심리학 수업도 찾아 들었다"며 "전쟁 상황에 익숙해진 듯 보여도 우울하고 부정적 생각이 가득하다. 인생을 즐길 수가 없게 됐고 삶의 모든 측면이 변해버린 것 같다"고 털어놨다.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리기엔 기약없는 전쟁은 젊은 남녀에게 너무 가혹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신혼살림을 차렸을 터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향하는 오후 2시40분발 45인승 대형버스는 금세 가득 찼다. 버스 운전사는 16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고했다. 요금은 700흐리우냐(약 2만4천원)였는데 우크라이나 화폐를 받았다.
여성이 열에 아홉이고 남성은 노인이거나 아이뿐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총동원령으로 징집 가능 연령대 남성의 출국이 사실상 금지됐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겨울철 거리는 초저녁부터 어둑어둑해졌다.
출발한 지 5시간쯤 지난 저녁 7시 40분께 휴대전화가 갑자기 먹통이 됐다. 국경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왕복 2차로 도로 오른쪽에 수㎞ 이어진 대형 트레일러 화물차 줄이 눈에 들어왔고 그 끝엔 형광 조끼를 입은 약 100명이 모여있었다. 수개월째 우크라이나산 곡물 트럭을 봉쇄하며 시위 중인 폴란드 농민이었다.
긴장 속에 바리케이드를 지나자 라바-루스카 국경 검문소가 나왔다.
폴란드 쪽에서 출국하는 과정은 비교적 수월했지만 우크라이나 입국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 여권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무작위로 검사했다. 폭발물탐지견은 버스 통로를 오가며 맹렬히 냄새를 맡았다.
자국 군인이었지만 '교전국'에 들어섰다는 생각에선지 승객들의 얼굴이 더욱 굳어진 듯했다. 검문검색이 꽤 오랫동안 이뤄졌지만 불만을 터뜨리거나 항의하는 이는 없었고 두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서쪽 국경을 넘어 키이우로 가는 고속도로는 가로등 하나 없었다. 버스는 칠흙같은 어둠 속을 헤드라이트에만 의지해 길을 재촉했다.
간이휴게소는 검은 바다 위 등대처럼 희미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간식거리나 음료 따위가 어설프게 진열돼 있었으나 이를 사려는 승객은 별로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에게 달라붙어 구걸하는 젊은이도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초로의 한 남성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꼽혀온 알렉세이 나발니가 16일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돌연 사망한 일을 언급했다.
그는 "푸틴이 죽인 것이 분명하다"라며 "푸틴의 독재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나, 러시아에도 지금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내뱉었다.
버스는 다행히 연착하지 않고 현지 시각으로 18일 오전 7시30분께 키이우 시내에 도착했다.
기차역 옆 버스터미널 부근에는 군복 차림의 남성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군인으로 보였는데 마중 나온 전우와 포옹을 나눈 뒤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키이우의 날씨는 구름이 잔뜩 껴 을씨년스러웠다. 휴일 아침이어서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인근 호텔의 직원 로만(34) 씨는 외국인 기자를 보더니 "지하 주차장에 방공호가 있다"며 "나는 잘 내려가지 않지만 공습경보가 울려면 찾아 내려가라"고 안내했다.
그는 "2년 전 푸틴이 이곳을 집요하게 공략했지만 우리는 미사일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군인들을 위해 물자를 나르고 음식을 제공했다"며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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