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플 브뤼셀] 트럼프 리스크에 '나토 집단방위'만 믿던 유럽 딜레마

입력 2024-02-16 05:45
[와글와플 브뤼셀] 트럼프 리스크에 '나토 집단방위'만 믿던 유럽 딜레마

美 방위비, 나토 전체 68% 차지…나토식 핵 공유도 美 승인해야 가동

유럽 일각선 '美 탈피·전략적 자율성' 거론…나토 수장 "유럽 자가방어 못해"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를 향한 당신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에 대비해 새로운 핵억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나토 와해 가능성이 걱정되진 않습니까.'

15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방장관회의 현장.

유럽 각지에서 집결한 취재진은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각국 장관들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트럼프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회의장 전반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우크라이나 언론사 소속이라는 한 기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트럼프 얘기뿐"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실제로 그간 나토 회의에서는 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동 분쟁 등 굵직한 현안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하지만 이날은 흡사 '트럼프 재선 대비 회의'에 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최근 연일 내놓고 있는 나토 관련 발언들이 현실화할 경우 그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란 인식이 깔린 셈이다.

엄밀히 말해 트럼프가 제기한 '비용 분담(burden sharing) 불균형'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나토 자료에 따르면 2023년(추정치) 나토 31개국의 방위비는 총 1조2천600억 달러로, 이 가운데 미국은 68%에 해당하는 8천600억 달러를 지출했다.

같은 해 유럽 회원국 및 캐나다는 모두 합쳐 미국의 절반 수준인 4천41억 달러를 기여하는 데 그쳤다.

나토가 지표로 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로 따져 보더라도 차이가 있다.

미국은 작년 GDP 대비 3.49%를 방위비로 지출했다. 나토가 2014년부터 방위비 목표 가이드라인으로 삼는 'GDP 2%' 기준을 훌쩍 넘는다.

이에 비해 31개국 중 2%를 넘긴 회원국은 미국을 포함해 11개국에 불과했다.

올해는 2% 달성 회원국이 18개국으로 늘어날 예정이라고 나토는 강조한다. 목표 달성 회원국 수가 절반을 넘기는 데 꼬박 10년이 걸린 셈이다.

이런 탓에 역대 미 행정부는 유럽 회원국들이 방위비를 더 늘려야 한다고 줄곧 요구해왔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도 기자회견에서 "미국에서 제기된 비판은 주로 일부 회원국이 충분한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이는 타당하고 공정한 지적"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나토의 근간인 집단방위 체제까지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방위비 목표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회원국은 러시아가 공격하더라도 보호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토 조약 5조를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토 집단방위 조약인 5조에 따르면 회원국 중 하나가 공격받으면 나토 전체를 공격한 것으로 간주, 무력 사용을 포함한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냉전 이후 유럽이 국방 분야 투자를 크게 줄이고도 안보 걱정을 크게 하지 않은 것도 결국은 이런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각국이 뒤늦게 군비증강에 나서긴 했으나 미국을 주축으로 한 나토 집단방위 체제 의존도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크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수십년간 군사 중립 노선을 끝내 폐기하고 나토 가입을 신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럽 입장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기댈 곳이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나토 핵 공유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된다.

미국은 핵 공유 체제에 따라 나토 5개 회원국(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터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 사용 권한은 미국에 있다. 미 대통령이 승인하지 않으면 유사시라 하더라도 가동될 수 없는 구조다.

이에 유럽에서는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으면서 소위 '전략적 자율성'이 다시 힘을 받고 있다.

독일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국 대신 핵보유국인 프랑스, 영국과 협력해 '유럽식 핵 공유'를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외신은 전했다.

미국이 나토를 통해 제공하는 안보 우산에서 탈피해 자체 국방력을 키우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장 여력이 안 되는 데다 현실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유럽 최대 무기·군수품 생산업체 중 하나인 독일 라인메탈의 아르민 파페르거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BBC 인터뷰에서 유럽이 자력 방어에 필요한 만큼 탄약고를 채우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토도 유럽의 독단적 움직임이 안보를 더 취약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유럽 동맹들이 방위비 투자를 늘리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는 나토의 대안이 아니다"라며 "나토 방위비의 80%는 비유럽 회원국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는 로이터 통신과 별도 인터뷰에서는 "유럽연합(EU)은 스스로 유럽을 방어할 수 없다"고 직언하기도 했다.

shi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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