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러시아 손님이 80%"…두바이에 몰린 러 부유층

입력 2024-02-15 06:06
[르포] "러시아 손님이 80%"…두바이에 몰린 러 부유층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두바이 이주 많아져

"명품 매장 큰손은 이제 중국인 아닌 러시아인"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 "손님의 80%가 러시아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쟁 뒤부터요."

14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호화 호텔이 몰린 주메이라 지역의 한 호텔 매니저는 '러시아인이 많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철 성수기를 맞은 이 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한화로 100만원 안팎. '호화 관광도시' 두바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호텔이다.

"비즈니스 출장자가 많으냐"고 묻자 "아니다. 가족 단위가 대부분이다. 호텔 숙박비가 꽤 높은 데도 러시아 손님은 장기 투숙도 많이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 곳뿐 아니라 다른 호텔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호텔 로비 이곳저곳에서 러시아어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이 호텔은 러시아인 손님이 늘어나자 지난해 안내 데스크에 러시아 직원 2명을 더 채용했다.

이전에도 두바이의 최고급 호텔이나 아파트는 주로 에너지 사업을 하는 러시아인이 주요 고객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부쩍 많아졌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전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2월 이후 UAE의 거주 비자를 받고 정주한 러시아인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최대 50만명 정도가 된다는 추산도 나온다. UAE 전체 인구의 5%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다.

두바이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는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로 유럽에서 영업하기 어려워진 러시아 회사가 두바이로 옮기기 위해 법률 상담하는 경우가 꽤 많아졌다"고 전했다.

12일 중동 최대 규모 쇼핑몰 두바이 몰의 명품 매장도 러시아인이 '큰손'이 됐다고 한다.

H 브랜드 명품 매장 직원은 "몇 년 전까지 중국인이 주요 고객이었지만 이젠 러시아인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경기가 좋지 않기도 하지만 러시아인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손님도 종종 보이는 것을 보면 전쟁 때 이들 나라의 부자들이 두바이로 꽤 건너온 것 같다"고 추측했다.

두바이 몰 곳곳의 광고판과 안내표지는 영어와 함께 러시아어가 병기돼 있었다.



UAE로 러시아 부유층이 모이는 것은 UAE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정치·외교적으로 중립적인 데다 러시아와 실리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두바이는 사업, 금융 환경이 자유롭고 외국인에 대해 이슬람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으면서 자녀 교육, 생활 여건도 선진국에 버금간다.

유럽 대부분 국가가 러시아와 교류를 끊은 것과 달리 두바이 정부 소유의 에미레이트 항공은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모스크바 직항편을 매일 운항하고 있다.

두바이 몰에서 만난 한 러시아인 사업가는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계속돼 지난해 초 두바이에 지사를 내고 가족과 함께 두바이에 왔다"며 "아이들도 학교에 적응을 잘해 전쟁이 끝나도 계속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전쟁 상황에 대해선 "러시아 젊은이들의 슬픈 희생이 더 없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2022년 말 파리에서 두바이로 옮겨 부동산업을 한다는 러시아인은 "유럽에선 러시아를 규탄하는 시위가 자주 열려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았다"며 "두바이는 그런 시위를 아예 법적으로 할 수 없고, 각국 사람들이 정치 얘기는 하지 않고 사업만을 위해 섞여 살아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두바이로 와 집을 구하는 러시아인의 수요가 많아 사업은 잘되는 편"이라고 했다.

두바이의 인구는 팬데믹 전 약 335만명이었다가 지난해 말 365만명으로 10% 가까이 증가했다.

이런 영향으로 2020년 1월 대비 지난해 말 월세는 42%, 매매 가격은 33% 상승했다. 지난 한 해로만 보면 월세는 약 30% 올랐다.

이를 두고 두바이가 분쟁과 안보 불안의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곳은 중동에서 가장 치안과 생활 환경이 우수하면서도 개방적이고 서방과 반미 진영 모두와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 역내뿐 아니라 유럽의 부유층이 이주지로 선호하는 곳으로 꼽힌다.

2009년 금융위기에 두바이는 채무불이행(디폴트)을 겪었으나 2011년 시리아 내전, 2014년 이슬람국가(IS) 사태가 이어지자 두바이로 자금이 몰리면서 경제가 되살아 난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이 두바이 경제엔 결과적으로 이익이 됐다는 것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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