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도로 메운 성난 농심, 파리 코앞 몰려온 트랙터 시위대

입력 2024-01-30 09:00
[르포] 도로 메운 성난 농심, 파리 코앞 몰려온 트랙터 시위대

"농민 없이는 국가 없다"…수도권 주변 고속도로 8곳서 1천여명 점거 시위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 강력 대책 요구…이불·텐트 챙겨와 노숙시위 채비도

당국 1만5천명 병력·장갑차 배치, 정부 지원대책 마련 중…"국민 89%는 농민시위 지지"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농민 없이는 국가도 없다', '우리의 끝은 당신의 굶주림이 될 것이다'

29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0㎞가량 떨어진 15번 고속도로.

농장에 있어야 할 육중한 트랙터 50여대가 상행선 4차로를 가득 메웠다.

후미에 있던 트랙터 한 대가 트레일러에 실린 짚 더미를 도로 위에 한 무더기씩 내려놓으며 간이 벽을 만들었다. 그 위로 '농업 없인 식량도 없다'는 플래카드가 막 내걸렸다.

이날 오후 2시부터 15번 고속도로를 포함한 프랑스 수도권 인근 고속도로 8곳에 정부 규제 정책 등에 항의하는 성난 농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달 18일 남서부 지방에서 처음 시작된 트랙터 시위가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나가 수도 파리 목전까지 닿은 것이다.

여차하면 파리 시내로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 도심을 마비시키겠다는 기세로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이날 15번 고속도로 위에만 70여명, 수도권 전체로는 1천명가량의 농민이 모였다. 농민들은 정부가 흡족할 만한 농가 지원 대책을 내놓기 전까진 이 도로를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다.

철야, 장기전에 대비해 농민들은 매트리스와 이불, 텐트도 챙겨왔다. 도로 한쪽엔 천막으로 만든 간이 식당과 이동식 화장실도 설치했다.

프랑스 농민들이 노숙 시위까지 불사하고 나선 건 일은 일대로 하는데 점점 먹고 살기는 어려워져서다.

프랑스는 유럽 내 가장 넓은 농지를 가진 농업 대국이다. 와인 재료인 포도를 비롯해 밀, 보리, 옥수수, 감자 생산으로 유명하고, 소, 양 등 축산·가공업도 발달해 있다. 농가 수는 2020년 기준 41만 가구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최저 임금 시급 혹은 그보다 못한 벌이에 직면해 있다는 게 농민들 주장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기욤(43)씨는 "일주일에 70시간을 일해도 한 달 최저 임금의 소득을 얻기가 쉽지 않다"며 "은퇴해도 한 달에 700∼800유로(약 100만∼110만원)밖에 못 받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아들까지 4대째 농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셀린느(45)씨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 역시 "주중·주말 따질 겨를도 없이 일하는데 최저 임금보다도 못 벌고 있다"며 "지금도 상황이 안 좋은데 앞으로는 더 안 좋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프랑스 정부는 농가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의 시장 가격을 결정할 때 농민들이 생산비를 고려해 가격을 제안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들은 식품제조업체나 유통업체와의 가격 협상 테이블에서 '을'의 위치에 놓여있다고 토로한다.

에너지 비용 등 늘어난 생산비를 가격에 반영할라치면 유통업체 등에서 소비자 반응을 고려해 난색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판권을 쥐고 있는 유통업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런 데다 정부가 트랙터 연료인 농업용 경유 면세 제도를 없애겠다고 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그나마 가브리엘 아탈 총리가 지난 26일 농심(農心) 다스리기 차원에서 면세 폐지 조치를 철회했지만 농민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전국농민연맹 일드프랑스 지부의 다미앵(53) 사무총장은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라 더 강력하고 구체적인 약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점점 농업 하기 힘들어지는 규제 환경도 이들이 도로로 나온 이유다. 유럽연합(EU)의 농업 표준을 지키기도 버거운데 정부가 한술 더 뜬다는 불만이 농민들 사이에 팽배하다.



다미앵 사무총장은 "EU의 규제까지는 받아들이겠지만, 그를 넘어선 정부의 규제는 폐지하는 게 맞다"는 입장이다.

농민들이 더 화나는 건 자신들에겐 금지된 방법으로 생산된 외국 농산물이 낮은 관세로 수입돼 들어온다는 점이다.

과도한 행정 업무도 불만이다.

15년째 농업에 종사해 왔다는 기욤씨는 "예전엔 하루 한 시간 정도만 행정 처리를 하면 됐는데, 지금은 3시간, 4시간이나 사무실에 앉아 있는다"며 "제발 우리가 농업에만 집중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언제까지 트랙터 시위를 이어갈까.

다미앵 사무총장은 "정해지지 않았다"며 "정부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시위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욤씨 역시 "언제까지 이 농성을 이어갈지 모르지만, 너무 길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저도 프랑스인이고, 다른 프랑스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이날 농민 시위로 고속도로 일부 구간의 차량 통행이 전면 통제돼 수도권 일대 곳곳에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다행히 프랑스인들 대다수는 농민들의 시위를 응원하고 있다. 지난 24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가 여론조사 업체에 의뢰해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9%가 농민 시위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이날 15번 고속도로 하행선을 지난 많은 시민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거나 창문을 내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식으로 동조를 보냈다. 일부 시민은 "여러분 감사하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시위 현장 인근을 지나던 우버 기사 다비드씨는 "차가 막혀서 불편한 점은 있지만, 농민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며 "그들은 주말도 없이 일하는데 그만큼의 돈을 못 버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시위대가 파리 시내 진입을 시도할 경우에 대비해 이날 1만5천명의 경찰과 헌병을 동원했다. 한때 시위대가 파리 남서부 쪽 최대 규모의 렁지스 시장을 봉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이 부근엔 장갑차도 배치했다.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서둘러 추가 지원 대책을 마련 중이다.

아탈 총리는 이날 저녁 총리실에 농민 단체 대표들을 불러 의견을 나눴다. 이어 30일 오후 국회에서 예정된 대국민 정책 발표에서 추가 농민 지원 대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내달 1일 EU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면담해 프랑스 농민들의 불만을 전달하고 EU 차원의 농민 지원안 마련을 촉구할 예정이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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