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은 왜 이스라엘을 국제법정에 제소했나
만델라 시절부터 팔 지지 확고…'올해 총선 겨냥' 분석도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 가자지구 전쟁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에 대해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혐의가 있다며 국제사법재판소(ICJ)까지 끌고 간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이스라엘과 지리적으로 먼데다 평소 외교·종교적으로도 별다른 갈등을 빚지 않았던 터라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남아공은 팔레스타인과도 눈에 띄는 유대가 없었다.
남아공은 11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시작된 이 재판에 법무장관을 단장으로 한 최고의 법조인으로 꾸린 변호인단을 보냈다.
남아공의 이런 행보에 대해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아공 정부와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비교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민감성에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종식하고 대통령에 오른 넬슨 만델라가 1997년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유 없이는 우리의 자유도 불완전하다"고 말한 것에서 남아공 정부와 ANC의 이런 입장은 잘 드러난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최근 ANC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만델라의 가르침이 남아공 정부의 이번 제소에 영감을 줬다며 "이는 원칙의 문제"라고 설파했다.
남아공의 인권변호사 탐산카 말루시는 AP 통신에 "남아공 정부의 많은 사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억압을 경험했다"며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을 유엔 최고법원에 제소하기로 한 결정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올해 총선을 앞둔 국내 정치적 상황도 남아공 정부와 ANC의 또 다른 동기가 될 수 있다고 AFP 통신은 짚었다.
사상 최악의 전력난과 높은 실업률,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등으로 ANC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오는 5월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50%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ANC로서는 '핍박하는 강자'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구도를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했던 자신들의 역사에 투사해 지지층 결집을 노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국제적으로 원칙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핵심 가치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국내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AFP 통신은 분석했다.
인종관계연구소의 사라 곤은 "ANC는 ICJ 제소를 합법성과 정통성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며 "지난 30년간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아프리카 대륙의 대표국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위상과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일련의 행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자지구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전세계가 이스라엘의 군사적 강경책, 하마스의 잔혹한 기습 작전, 가자지구의 인도적 참사를 두고 혼란과 반목을 겪는 상황에서 남아공의 분명한 선택과 행동이 대내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외교 소식통은 "작년 브릭스 의장국으로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에티오피아의 가입을 끌어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을 중재하는 '아프리카 평화이니셔티브'를 주도한 것처럼 남아공의 최근 행보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이려는 의도가 읽힌다"고 말했다.
hyunmin6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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