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범 엡스타인 문건 공개…클린턴·트럼프·英왕자 등 거명(종합)

입력 2024-01-04 15:47
성착취범 엡스타인 문건 공개…클린턴·트럼프·英왕자 등 거명(종합)

총 200명 가까운 실명 드러나…"이름 올렸다고 범죄 직접 연루는 아냐"

美법원 재판문건 공개…스티븐 호킹, 데이비드 코퍼필드도 언급

외신 "실명 적시 인사들, 성범죄 가담 안했어도 평판 흠집날 듯"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미성년자 성착취 혐의로 체포되자 구치소에서 자살한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재판 관련 문건이 3일(현지시간)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판 과정에서 익명으로 처리됐던 인사들의 이름이 담긴 이 문건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어린 여성을 좋아했다거나 미 정치권과 금융계 주요 인사들이 엡스타인이 고용한 여성들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했다는 등 주장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AFP 통신에 따르면 이날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은 지금껏 공개하지 않았던 엡스타인 재판 관련 문건 40건을 공개했다.

거의 1천쪽 분량인 이 문건들은 피해자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주프레가 엡스타인의 미성년자 성착취 행각을 도운 여자친구 길레인 맥스웰을 상대로 2015년 제기한 소송과 관련된 것이다.

이 문건 중 일부가 이후 몇 차례 공개되기도 했지만, 엡스타인이 저지른 범죄와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익명 처리됐다.

그러나, 지난달 뉴욕 연방법원의 로레타 프레스카 판사는 익명 처리 인사들의 실명을 공개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문건 공개가 이뤄지게 됐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엡스타인은 생전 폭넓은 인맥을 자랑했고, 그의 재판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인물은 17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은 이름이 공개될 인물이 200명 가까이 된다고 전했다.

실명 공개에 직면한 일부 인사들은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그런 그들과 연관됐다는 이유만으로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 건 부당하다며 법원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블룸버그 통신은 수백건의 문건이 공개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이날 1차로 공개된 문건들은 각종 이메일과 녹취록, 소송자료로 구성돼 있었다고 전했다.

이 문건에서 실명이 적시된 인사 대다수는 이미 엡스타인과의 관련성이 드러나 홍역을 치렀던 인물이라면서 "새롭게 나오는 정보가 있을지 불명확하다"고 통신은 전했다.

실제,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최고경영자였던 제스 스테일리와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공동창업자 리언 블랙은 엡스타인과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이미 사퇴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빅토리아 시크릿 창업자 레슬리 웩스너 등도 이와 관련해 명성에 흠집이 났다.

다만, 실명 공개 명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엡스타인의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설명이다.

엡스타인과의 인맥이 문제가 됐던 인물들은 모두 엡스타인의 범죄 행위에 동참했다는 의혹을 부인해 왔다.

일부 외신은 이날 공개된 자료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관련한 내용에 초점을 맞췄다.

dpa 통신은 피해자 중 한 명인 요안나 쇼베리가 재판에서 한 증언에는 엡스타인에게서 "(클린턴 대통령은) 소녀들과 관련해선 어린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작고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막내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2001년 엡스타인의 맨해튼 저택에서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는 쇼베리의 증언이 담긴 문건도 실명이 적시된 상태로 공개됐다.

영국 왕실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인해 왔으나 앤드루 왕자는 자신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주프레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했으며 왕실 직함 대부분을 박탈당한 채 왕실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폭스뉴스는 공개된 문건에 유명 마술사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이름이 언급됐다고 전했다. 쇼베리는 엡스타인의 '친구'였던 코퍼필드와 디너 파티에서 만났고 그가 마술 트릭을 보여주기도 했다면서 "그는 내게 소녀들이 다른 소녀들을 찾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함께 공개된 별개의 녹취록에서 주프레는 정치권과 금융계 주요 인사 다수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그는 성관계 당시 자신이 미성년이었는지, 합의되지 않은 관계였는지 여부는 말하지 않았다.

주프레가 주장한 성관계 대상에는 미국 억만장자 사업가 톰 프리츠커가 포함돼 있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이러한 증언은 앞서 공개된 적이 없는 내용이라고 이 매체는 부연했다.

프리츠커는 이와 관련한 입장을 묻는 말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주프레는 이에 더해 헤지펀드 거물인 글렌 더빈,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 등과도 성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했다.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는 인공지능(AI)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마빈 민스키 전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명예교수도 성관계를 맺은 인물 중 하나라는 주프레의 주장 역시 이번에 공개된 녹취록에 있는 내용이었다고 전했다. 민스키는 2016년 사망했다.



한때 엡스타인의 전용기를 몰았던 조종사는 클린턴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유명인사들을 비행기에 태운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이밖에도 엡스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홍역을 치러 온 앨런 더쇼위츠 미국 하버드대 형법 교수와 가수 마이클 잭슨 등 인사들의 이름도 이날 공개된 문건에 거명됐다고 적었다.

dpa 통신은 엡스타인이 2015년 소송이 제기된 직후 맥스웰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피해자) 주프레의 친구나 동료, 가족 중 의혹이 거짓이라고 입증하는 걸 도울 수 있는 이라면 당신은 누구든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적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엡스타인은 이 이메일에서 "가장 강력한 건 클린턴과의 디너와 버진 아일랜드에서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미성년자와 집단 성관계에 관여했다는 새로운 주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엡스타인은 수십명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 직후인 지난 2019년 뉴욕의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범인 맥스웰도 중형을 선고받은 채 복역 중이다.

이날 공개된 문건을 포함해 공개 명령을 받은 엡스타인 재판 관련 문서의 분량은 전체 2천24쪽에 달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문건에 이름이 오른 많은 남성들은 어떤 성적 비행으로도 기소되지 않았지만, 엡스타인과 사회적으로 가까웠다는 것만으로도 평판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엡스타인의 미성년자 성착취 의혹을 앞장서 보도하고 소송까지 불사하며 문건 공개를 이끌어낸 현지 매체 마이애미 헤럴드는 "(실명공개로) 엡스타인의 성범죄로 점철된 추악한 세계에 함께했던 부유하고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년간의 추측이 마침내 끝을 맺게 됐다"고 평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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