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든데스' 위기 거론한 최태원, SK지휘부 전격교체로 돌파구
대내외 환경 급변에 새 리더십 기용…'신속한 혁신·성과 창출' 메시지
추진력 강한 사촌동생 최창원, 변화 주도할 2인자로 중용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SK그룹이 7일 발표한 임원 인사에서 부회장단을 전면 교체한 배경에는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 한층 더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그룹의 핵심 미래사업 분야 성장을 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금리와 지정학적 위기 등에 따른 전 세계적 경기침체 여파로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로 요약되는 그룹의 핵심 성장동력이 부진을 겪는 가운데 강도 높은 혁신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으면 '서든 데스'(sudden death·돌연사)에 이를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인사에 투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 대내외 불확실성에 핵심사업 부진…'서든데스' 위기감 반영
앞서 SK는 지난해 BBC를 중심으로 한 핵심 사업 분야에 2026년까지 247조원을 투자하고, 이를 키워나갈 인재 5만명을 국내에서 채용하겠다는 공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투자 규모가 가장 큰 반도체 분야는 SK하이닉스의 적자 폭이 줄고는 있으나 정보기술(IT) 전방 수요 위축 영향이 워낙 큰 탓에 올해 3분기까지 4개 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왔다.
배터리 계열사인 SK온은 올해 4분기 흑자 전환을 노리고 있으나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라는 걸림돌을 만났고, 바이오 분야에서도 SK바이오사이언스와 SK바이오팜의 실적이 계속 부진을 보이는 등 투자가 집중된 주력 산업의 근래 성적표가 신통치 않다.
이런 상황에 대한 SK그룹의 문제의식은 최태원 회장의 최근 발언에서 드러난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그룹 연례행사 'CEO(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지정학 위기 심화 등으로 경영 환경이 예측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급변하는 상황을 언급하며 서든 데스 위험을 강조했다.
최 회장이 서든 데스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6년 SK그룹 확대경영회의에서도 "현 경영 환경에서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슬로우(느린)가 아니라 서든 데스가 될 수 있다"며 기존 틀을 깨는 발상 전환을 주문했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경제 성장률 전망치 하향, 18개월 연속 수출 감소 등 대내외 경영 불확실성이 고조된 상황에서 경영진이 고강도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후 그해 말 연말 인사에서 SK그룹은 주력 사장단을 50대로 교체하는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이번에 2선으로 물러난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등이 당시 인사에서 중용된 이들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올해 SK그룹 인사에서 큰 폭의 세대교체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작년 인사는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그룹 내에서 돌 만큼 안정을 지향하는 기조였으나, 올해에는 여러 여건을 볼 때 조직 쇄신이 급선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은 그룹 인사를 앞둔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2023 트랜스퍼시픽 다이얼로그(TPD)'에서 취재진을 만나 "새로운 경영진에게도, 또 젊은 경영자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는 때가 당연한 것"이라면서 "변화는 항상 있는 것이고, 결과를 한 번 지켜보라"며 인사 방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최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그룹의 실질적 콘트롤타워인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돼 사실상 '2인자'로 불리는 자리에 오른 것도 이처럼 신속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최창원 의장은 치밀한 성격에 남다른 업무 추진력까지 갖춘 받는 기획·재무통으로 알려졌다.
그린 소재와 에너지, 바이오 등 그룹의 미래 먹거리 발굴과 사업 재편 등에서 경영인으로서 전문성도 인정받은 데다, 실행력까지 강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룹 안팎에서는 SK가 변화와 혁신에 속도를 낼 때라는 공감대에 따라 그룹 의사결정 전반을 조율하면서 신속하게 혁신을 실행할 적임자로 최 의장을 낙점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1998년 경영권을 승계할 당시부터 가족들이 자신을 별다른 갈등 없이 지원해줬다는 '마음의 빚'이 이번 인사에까지 이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상속이나 경영권과 관련한 다툼 없이 그룹을 이끌 수 있었던 최 회장은 지난 2018년 취임 20주년을 맞아 이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사촌 형인 고(故) 최윤원 SK케미칼 회장과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가족, 동생인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등 친족들에게 SK㈜ 주식 329만주를 증여하기도 했다.
이번 인사에서 사촌인 최창원 의장의 그룹 내 위상을 높여준 것 역시 과거 경영권 승계 당시 자신을 지지해준 데 대한 보은 성격도 포함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있다.
아울러 최 회장의 후계 문제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가운데 혹 사촌을 포함한 일가 구성원들이 각자 전면에 나서는 일이 벌어질 경우 지금까지 유지해 온 그룹 내 시너지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선제적으로 최 의장을 2인자로 끌어올린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 '제대로 된 투자'와 지속 성장 모두 잡을 CEO 중용
이번 CEO 인사는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투자 시스템을 재검토하고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 실질적 성과를 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도 풀이된다.
최 회장은 지난 CEO 세미나에서 "투자 결정 때 매크로(거시환경) 변수를 분석하지 않고 마이크로(미시환경) 변수만 고려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투자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철저히 검증하고 투자 완결성을 확보하라고 CEO들에게 강하게 주문했다.
아울러 "CEO들은 맡은 회사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룹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솔루션 패키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며 "더불어 거버넌스 혁신까지 여러 도전적 과제를 실행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어 나가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인사에서 중용된 주요 관계사 신임 CEO들의 면면도 투자를 통한 사업 확장뿐 아니라 실제 경영 성과 창출에 이르기까지 전문성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다.
투자 전문 지주회사 SK㈜를 새로 이끌게 된 장용호 신임 사장은 SK머티리얼즈(옛 OCI머티리얼즈)와 SK실트론 인수를 주도하고 직접 경영에까지 관여하며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신임 사장 역시 SK네트웍스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회사의 사업 재편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기업 가치를 높인 점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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