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간토대학살 100주년 지나가는데…日정부 끝까지 외면하나
日정부, 시종일관 "학살 기록 없어"…자료 제시해도 "사실관계 파악 못해"
"과거 불행한 일로 끝내서는 안돼" 조선인 학살 日연구자 '일갈' 귀담아들어야
(도쿄=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올해 일본 언론은 한국 언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 문제를 다뤘다.
진보나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도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 직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조명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 약 3천 명이 다마가와를 건너 나카노부 습격', '요코하마의 큰불은 조선인이 방화' 같은 헛소문이 돌았고, 불안에 빠진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동참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도 학살 대상이 됐다. 도쿄 인근 지바현 마을 후쿠다무라(福田村)에서는 시코쿠 지역에서 상경한 일본인들이 사투리를 쓰다가 조선인으로 오인돼 마을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역사를 직시하고자 한 일본인들은 그동안 조선인 학살과 후쿠다무라 사건 등에 주목해 현장을 답사하고 자료를 연구해 성과물을 발표했다. 올해도 일본에서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한 책이 연초부터 꾸준히 발간됐다.
그러나 민간 부문의 이러한 움직임과 대조적으로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관한 사실관계를 입증할 사료가 나오지 않았다며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특히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 관련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답을 되풀이했다.
심지어 그는 100년 전 조선인 학살이 자행됐음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일본 정부 문서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지난 9일 참의원(상원) 내각위원회에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이시가키 노리코 의원은 1924년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각의(閣議)에서 결정한 문서를 언급하며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물었다.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된 이 문서에는 "1923년 9월 대지진 당시에 혼란스러웠을 때 조선인 범행의 풍설(風說·소문)을 믿은 결과, 자위의 뜻을 갖고 잘못해서 살상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서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특사 혹은 특별특사의 절차를 행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각의 결정은 합의체인 내각의 의사결정이라는 점에서 이 문서는 의미를 지닌다고 마이니치는 설명했다.
하지만 마쓰노 장관은 이시가키 의원이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는 정부 내 문서가 아닌가"라고 추궁한 데 대해 "공문서관은 내각부 소관 독립행정법인으로 국가와는 다른 법인격을 갖는다"는 궤변에 가까운 답을 내놓았다.
마쓰노 장관은 또 '각의 결정 문서가 정부 내 문서인가'라는 질문에는 "담당 각료인 국가공안위원장이 답변할 것"이라며 공을 넘겼다.
이에 바통을 넘겨받은 마쓰무라 요시후미 국가공안위원장은 "내용에 대해 답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책임을 피해갔다.
이시가키 의원이 "각의 결정된 문서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라고 물으며 압박하자 마쓰무라 위원장은 해당 문서가 각의에서 결정됐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사실관계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다"고 언급했다.
정부 책임을 회피하려다 보니 정부 문서에 나와 있는 내용조차 사실로 확인해주지 못하는 궁색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일본 정부의 모르쇠는 이달 17일에도 지속됐다. 구스노키 요시노부 경찰청 관방장은 또 다른 입헌민주당 의원이 해당 문서에 대해 질의하자 "문서 자체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그 이상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며 "사실관계에 대해 확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며,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기록을 찾아 제시해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탓에 조선인 학살 사건의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은 별다른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간토대지진 100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에도 일본 정부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향후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더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인 학살에 대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견해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올 만하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일본인들의 외침에 더 주목하고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다.
책 '후쿠다무라 사건'을 쓴 쓰지노 야요이 씨는 올해 펴낸 개정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후쿠다무라 사건도 조선인 학살도 과거의 불행한 일이었다고 끝낼 수는 없다. 비슷한 사건이 지금 일본 어딘가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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