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첩보기관 앞에 비밀경찰 창시자 동상…'공포정치 망령' 부활?

입력 2023-09-12 16:53
수정 2023-09-13 16:38
러 첩보기관 앞에 비밀경찰 창시자 동상…'공포정치 망령' 부활?

KGB 전신 '체카' 설립한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 SVR 본부 앞에 세워

소련 초기 반대파 숙청 '적색 테러' 이끈 인물…"옛 소련 향수 자극"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러시아가 옛 소련 초기 반대파를 상대로 잔혹한 숙청을 이끈 인물이자 비밀경찰 창시자의 동상을 정보기관 본부 앞에 다시 세웠다.

11일(현지시간) 로이터와 AF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은 이날 모스크바의 남부 야세네보 지역에 있는 본부 건물 앞에서 펠릭스 예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1877∼1926년)의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제르진스키의 생일에 맞춰 열린 이날 제막식에서 세르게이 나리슈킨 SVR 국장은 "제르진스키는 시대의 상징이며 투명한 정직함, 헌신, 의무에 대한 충성의 기준이 됐다"며 "그는 선과 정의라는 자신의 이상에 마지막까지 충실했다"고 추켜세웠다.

일부 러시아인들은 그러나 이번 동상 건립이 러시아에 만연해진 억압을 보여주는 지표로 보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 수백명을 구금했다.

제르진스키는 소련 초기 반대파를 학살하다시피 한데다 악명높은 소련 비밀경찰 조직들의 '아버지' 격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르진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 인물로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수립된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비밀경찰 조직인 '체카' 설립을 주도했다.

정식 명칭이 '반혁명·파괴공작 퇴치를 위한 전러시아 특별위원회'인 체카는 러시아 내전 기간 암살과 즉결처형 등 잔혹한 방식으로 반대파를 숙청해 혁명정부를 도운 이른바 '적색 테러'의 주역이다.

체카의 설립자이자 수장인 제르진스키는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간 이 조직을 이끌며 제정 러시아 관료나 반대파는 물론 별다른 혐의가 없는 시민들까지 수천명을 체포해 총살하는 등 숙청공작을 지휘했다.

체카는 이후 게페우(GPU·국가정치국), 합동국가정치국(OGPU), 내무인민위원회(NKVD) 등으로 이어지는 소련 비밀 정치경찰 조직의 뿌리가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몸담았던 첩보·정치경찰 조직인 국가보안위원회(KGB)도 체카의 후신이다.

KGB에서 분리된 연방보안국(FSB)과 SVR 역시 제르진스키를 영웅시하고 있으며, 체카 조직원들 뜻하는 '체키스트'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스파이를 지칭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 그는 옛 소련의 철권통치와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소련 해체 직전인 1991년 8월 KGB 고위 인사 등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분노한 모스크바 시민들이 KGB 본부가 있던 모스크바 루뱐카 광장의 제르진스키의 동상을 철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알'의 역사학자 니키타 페트로프는 "제르진스키는 억압과 무법의 상징"이라며 "그는 법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따르는 소련 최초의 징벌적 기관의 수장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번에 SVR 본부 앞에 세워진 제르진스키의 동상은 1991년 시민들이 무너뜨린 KGB 본부 앞 거대한 동상을 32년만에 재현한 것이다.

새 동상은 1958년에 만들어져 '철의 펠릭스'라고 불리던 옛 동상보다는 약간 작지만, 긴 코트 차림에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앞을 바라보는 모습 등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AFP통신은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2차대전 때 소련이 나치를 패퇴시킨 것을 강조하면서 러시아에서 초강대국이던 옛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inishmo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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