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에 가려진 아제르·아르메 분쟁…"12만명 인종청소위기"
분쟁지역 아르메니아 주민들, 인도주의 통로 차단에 식량난 호소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전으로 입지 높아져…대체 경로 개통 추진
(서울=연합뉴스) 최재서 기자 = 러시아와 서방의 관심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쏠리면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오랜 분쟁이 외면받고 있다.
그 사이 분쟁 지역의 12만 아르메니아 인구는 식량과 연료, 의약품 부족으로 사실상 인종 청소에 내몰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더타임스는 3일(현지시간)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산악 지대에 갇힌 민간인 수만 명이 아사할 가능성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이 아제르바이잔의 봉쇄 속에 최소한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1994년 이후 두 차례 전쟁을 치렀다.
그중 2020년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이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러시아의 중재로 그해 11월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으며 국제사회 중재 시도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지역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외부 세계의 연결 통로는 5㎞ 길이의 '라친 통로'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라친 통로는 2020년 평화협상에 따라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감독을 받아왔고, 아르메니아 주민 사이에서 '생명의 길'로 불렸다.
그러나 작년 12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지원하는 활동가들이 카라바흐 지역에서 불법적인 광물 채취가 자행되고 있다며 통로를 막아섰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라친 통로를 통해 카라바흐 내부 아르메니아 민병대에 무기가 공급되고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아제르바이잔은 올해 4월 라친 통로에 검문소를 세웠고, 7월에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의료 차량을 이용한 밀수 행위가 적발됐다며 라친 통로를 폐쇄했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10주간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에게 식량 등 생필품과 의약품이 거의 배급되지 않고 있다.
지난달 초 시행된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30%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70%는 가족 구성원이 끼니를 줄이고 있다고 답했다.
카라바흐 지역 보건 당국은 응급수술을 제외한 모든 수술이 중단됐고 기본적인 의약품조차 부족한 형편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임산부의 90%가 빈혈을 앓고 있으며 유산율도 3배가량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40세 남성 1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는데, 겨울이 다가오면서 이러한 사례가 급증할 수 있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도주의 통로를 복구하려는 시도는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아그담 마을을 경유하는 대체 경로를 제안하며 보급로에서 아르메니아를 배제하는 방안을 꾀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반면 라친 통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규정한 2020년 평화협정 위반이라며 대체 경로에 반발해왔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내부에서는 대체 경로 거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단적 단식투쟁"이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양측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아제르바이잔에 기회를 제공했다고 더타임스는 분석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동맹국 이란, '프레너미'(친구이자 적)로 불리는 튀르키예와 자국을 이어주는 핵심 연결고리다.
유럽연합(EU)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야기된 에너지 위기로 인해 석유와 가스가 풍부한 아제르바이잔이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입지가 높아진 틈을 타 카라바흐 완전 장악을 목표로 두 통로의 동시 개방을 밀고 나가려는 모습이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의 외교정책 고문 히크메트 하지예프는 지난달 31일 "아제르바이잔은 더 이상 우리 영토의 '그레이존'을 용납할 수 없다"며 "불법적인 정권을 해체하고 무장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친 통로는 아그담 통로가 개통될 때만 재개할 수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관세 및 국경 정책을 준수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지난 1일 "라친 통로의 전면적인 운영과 아그담 통로 개통 순서를 반영한 단계별 접근이 논의되고 있다"고 밝혔다.
더타임스는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은 다가올 추위, 그리고 '인종청소'에 해당하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주 장려 정책을 동시에 맞이하는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적었다.
acui7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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