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비처럼 퍼부어"…사우디 수비대, 이주민 수백명 학살 의혹

입력 2023-08-21 17:04
수정 2023-08-21 17:06
"총알 비처럼 퍼부어"…사우디 수비대, 이주민 수백명 학살 의혹

국제인권단체 보고서 "예멘 국경서 1년여간 최소 655명 숨져…수천명일수도"

"총·포탄 사용해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공격…킬링필드 같은 상황"

"일자리 찾아 예멘 거쳐 사우디 가려던 이들…여성, 아동, 추방된 사람도 공격"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수비대가 예멘을 거쳐 자국으로 들어오려는 에티오피아 이주민 수백명을 학살했다는 인권단체의 보고서가 나왔다.

국경수비대는 여성과 아동이 다수 포함된 비무장 이주민들을 상대로 총은 물론 박격포 등 폭발 무기까지 사용했으며 사우디에서 예멘으로 추방된 사람들도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증언도 쏟아졌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1일(현지시간) 공개한 보고서에서 사우디 국경수비대가 지난해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약 15개월간 에티오피아 이주민 집단을 수십차례 공격해 최소 655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그들이 우리에게 총알을 비처럼 퍼부었다'(They Fired on Us Like Rain)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에티오피아 이주민 38명을 포함해 모두 42명의 증언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검증 내용, 사망자 등 현장 사진과 영상, 사우디-예멘 국경지역 위성사진 분석 결과 등이 담겼다.

인터뷰에 응한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은 내전으로 혼란한 모국에서 바다 건너 예멘으로 간 뒤 육로를 통해 사우디로 넘어가 일자리 찾으려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살 방도를 찾으려 밀입국 업자들에게 수천달러를 주고 목숨을 건 여행을 한 이주민들을 기다린 것은 사우디 국경수비대의 총알·포탄 세례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민들이 적게는 10명 안팎에서 많게는 200명 가까이 집단을 이뤄 월경을 시도했는데 사우디 국경수비대는 이들에게 박격포 등 포탄을 쏘거나 근거리 총격을 가했다.

한 생존자는 약 170명이 함께 국경을 건너려다 국경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90명이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시신을 수습하려 현장에 다시 갔던 이들이 사망자 수를 셌는데 90명이었다"고 전했다.

지난 2월 60명가량으로 구성된 이주민 집단에 끼어 국경을 넘으려던 14세 소녀 함디야는 포탄 공격으로 일행 가운데 약 30명이 숨졌다며 "사람들이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살해되는 것을 봤다. 나는 다치지 않았고 구조됐지만 무서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사우디 국경수비대의 이러한 공격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수십명이 숨진 것을 목격했으며 사지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등 심하게 훼손된 시신이 이주민 이동 경로를 따라 널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 가운데에도 상당수는 총이나 포탄 파편을 맞아 손가락이나 다리 한쪽을 잃는 등 크게 다쳤다.

HRW는 생존자들이 목격한 사례를 통해서만 최소 655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됐으나 실제 희생자 규모는 더 클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 작성을 이끈 HRW 난민·이주민 인권부서의 나디아 하드먼은 영국 BBC방송에 "최소 655명이지 실제로는 (희생자가) 수천 명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드먼은 "우리가 기록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량 학살이다. 사람들은 산비탈 전체에 흩어진 시신 등 킬링필드와 같은 상황을 묘사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사우디 국경수비대가 자국에서 체포된 뒤 추방명령을 받아 예멘으로 돌려보내지던 에티오피아 이민자들까지 공격했다.

당시 공격으로 얼굴을 다친 20대 여성은 국경수비대가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한 뒤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1㎞가량 달아나 쉬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를 향해 박격포를 발사했다"고 말했다.

국경수비대는 또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다른 생존자를 성폭행하라고 명령하고 이를 거절하면 즉결 처형했으며, 일부 생존자들에게는 몸 어디에 총을 맞을지 선택하라고 강요했다고 생존자들은 전했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매년 20만명 이상이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동북 아프리카 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예멘으로 간 다음 사우디로 이동한다.

인권 단체들은 이 과정에서 숱한 이주민들이 투옥과 구타 등 학대 행위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유엔 전문가들이 사우디 정부에 서한을 보내 국경에서 대포와 총기를 사용해 이뤄지는 무차별 살해 행위를 보고하기도 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고 BBC는 전했다.

HRW는 보고서에서 "사우디 국경수비대는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이주민들을 향해 폭발 무기를 사용하거나 근거리 총격을 가했다"며 "이러한 행위가 사우디 정부의 이주민 살해 정책의 일부로 자행된 것이라면 이는 반인륜적인 범죄"라고 강조했다.



inishmo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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