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하루새 환율 22%·금리 21%·상품가 25% 폭등…아르헨, 위기증폭

입력 2023-08-16 05:05
[르포] 하루새 환율 22%·금리 21%·상품가 25% 폭등…아르헨, 위기증폭

소비 체념한 소비자와 재빠르게 가격 인상하는 상인들 모습엔 근심 가득

경제 위기에 정치 불확실성까지 겹쳐…'10월 대선 본선까지 혼란 가중할 것"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이미 매일 매일 가격이 오르는데 더 많이 오른다고 바뀌는 게 있나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형마트에서 나오는 닐다(76)는 자신의 장바구니를 보여주면서 "몇 가지 사지 않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고, 어차피 가격은 오늘도 오르고 내일도 오르고 매일 오르기 때문에 특별히 가격을 확인하지 않았다"며 "아르헨티나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 이랬다"며 체념한 듯 말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예비선거(PASO) 다음 날인 14일 오전 기습적으로 공식 달러 환율을 22.45%를 올린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마트는 한산했다.

작년 7월, 마르틴 구스만 경제장관의 전격 사임 직후 시민들이 전자제품 상가와 대형마트로 달려가서 물건을 사재기하던 모습을 이번엔 찾아볼 수 없었다.

구스만 장관의 사임은 토요일 저녁에 이뤄져 시민들이 일요일인 다음 날 사재기에 나섰지만, 이번 환율 평가절하는 월요일 오전에 발표하면서 기업들이 물건가격을 즉각 인상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사재기에 나설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지 TV에서는 하루 종일 여러 상점을 방문하면서 얼마나 가격이 올랐는지를 질문하는 리포터들의 모습이 방영됐고, 상인들은 이미 25% 이상은 가격이 올랐다고 설명했다.

일부 상인들은 가게 문은 열었지만 가격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몰라서 판매를 잠시 중단한 곳도 있었고, 물건값을 재빠르게 올린 곳도 있는 등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한인 상점이 밀집한 아베야네다 의류 도매 지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미 체념한 소비자들과는 달리 생산자와 판매자들은 발 빠르게 가격을 인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시들이 찾는 옷을 주로 생산하는 김 모 씨는 "겨울 세일이 한창이어서 겨울 물건 가격은 올릴 수가 없고, 봄-여름시즌 옷은 최소 20% 이상 당장 올려야 한다. 방금 천을 공급하는 거래처에서 공급을 잠시 중단하고 새 가격을 알려준다고 해서 가격을 더 올려야 할 것 같다"면서 "가격이 이렇게 천정부지로 오르면 어떻게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 매우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수입천을 사용한다는 다른 한인의 한숨은 더 길게 느껴졌다.

"옷을 생산하는데 천뿐만이 아니라 단추, 지퍼 등 수입품에 많이 의존하는데 환율이 하루 만에 20% 이상 폭등했으니 판매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국산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연 115%가 넘는 인플레 때문에 가격책정과 시름 하는 것은 같다"는 이 모 씨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환율로 인해 수입천, 의류 부자재 가격은 치솟고, 생산가가 오르니 옷 가격도 오르고 판매는 허락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도매지역에서 나와 시내 한인 소매상점을 방문했다.

오후 시간이었으나, 매장 안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최 모(50) 씨는 "예비선거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시민들이 물건 구매보다는 인터넷 기사나 TV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가게 문은 열었지만, 판매 자체가 없다. 도매거래처에서 가격을 20% 인상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손님도 없는데 가격을 또 올려야 한다니 기가 막힌다"며 혀를 찼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해결사로 투입된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차례 평가절하 권고와, 10개가 넘는 각종 달러 환율 일원화 권고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식 환율의 급격한 평가절하보다는 점진적인 환율 조절을 선택해왔다.

이는 보유 외환 고갈과 연 세 자릿수 물가상승률 때문에 정부가 권고된 조치를 하고 싶어도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 예비선거에서 현지 화폐를 없애고 달러를 사용하자(DOLLARIZATION)는공약을 내세운 극우파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30% 이상 득표하면서 1위를 차지하자, 정부의 대응이 달라졌다.

시장의 동요를 방어해야 하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14일 오전 기습적으로 공식 달러 환율을 22.45% 인상한 후 10월 본선거까지 공식 환율을 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기준금리를 무려 21%나 인상하는 초강수를 뒀다.

미국이 0.25% 금리를 인상하면 베이비 스텝, 0.75%를 인상하면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하는데, 하루에 무려 21%를 인상은 어떤 단어로 명명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이로써 연 기준 금리는 118%로 올랐는데, 이는 실효이자율 209%를 뜻한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자고 일어나니 환율은 22.45% 뛰고 이자율은 21% 급등하고, 물건가격은 25%나 뛰는 세상을 맞이한 것이다.



"어제 환율과 금리가 급등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지난 금요일부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해서 한 30%는 올랐을 거다"라며 "어차피 매주 오르는데 오늘 더 올랐다고 사람들이 놀라는 것 같지도 않다. 돈도 없어서 사재기도 못 하고 화만 날 뿐이다"라는 카를로스(44)의 말은 마트에서 만난 닐다의 말과 비슷했다.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으면 밀레이 후보가 30%나 득표했겠는가"라면서 "이제 본선까지 두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던 마카레나(35)와 미겔(45)도 "가격이 올랐는지 아닌지 이젠 살펴보지 않고 산다. 매일 오르니 그걸로 스트레스 받기도 싫고 그렇다고 안 살 수도 없는 필수 식품이니까. 하지만 현 경제 상황이 매우 걱정스럽다"라고 답했다.

옆에서 장을 보던 70대 할머니는 "서민이 사는 작은 마트는 이미 가격이 다 올랐다. 여긴 부촌 마트라서 가격이 원래 높아서 아직 안 다 올린 것 같다"라고 귀띔해줬다.

대형마트를 둘러보니 정부가 지정한 '공정한 가격' 제품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촌의 마트라고 해도 시민들은 정부와 기업이 합의해 가격을 저렴하게 한 '공정한 가격' 제품들을 당연히 선호하는 것 같았다.

핸드폰 액세서리를 파는 작은 상점에도 손님은 없었다.

"정기적으로 가격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10% 올린 것 외에 아직 주인으로부터 더 올리라는 연락을 못 받았다"라고 하는 점원 페데(20)는 "핸드폰 액세서리는 수입품이니만큼 내일쯤 일괄적으로 올릴 것 같다"고 첨언했다.

옆에 있던 동료 점원 티아고(22)와 부루노(18)는 "이미 여러 사이트를 찾아보니 적게는 20% 많게는 50% 이상까지 가격을 올렸더라"면서 "원하던 신발 구매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르헨티나 최대 규모의 전자제품 상가에 들어가니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전날 오전에 소식을 접한 소비자들로 아침에 판매가 살짝 늘었으나, 이미 가격은 일괄적으로 30% 정도 인상됐으며, 안 오른 제품은 없다고 점원은 설명했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별명을 가진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레이 대선 후보가 예비선거에서 30%를 득표하면서 1위를 차지하자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선거 결과 발표 이후 모든 아르헨티나 뉴스 채널은 밀레이 후보에 대한 분석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예비선거 전 각종 여론조사에선 밀레이 후보가 20% 정도 득표해서 3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1위를 차지하자 현지 언론은 '아르헨티나 정치계의 대지진'이 발생했다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고공행진 하는 물가상승률과 함께 중앙은행 폐쇄나 달러화를 주장하는 밀레이 후보가 예비선거 1위를 했다는 사실이 현 경제 상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 모든 면에서 불투명성이 높아지자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선 오는 10월 대통령선거 본선까지 아르헨티나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전망이 우세하게 제기되고 있다.

sunniek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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