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흑해곡물협정 1년 내내 '어깃장' 속내는 제재 완화
서방 타협안 거부한 채 SWIFT 국제금융네트워크 재가입 요구
러 밀 수출량 역대 최대 경신중…수출 어려움은 '핑계' 지적도
(이스탄불=연합뉴스) 조성흠 특파원 = 러시아가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와 자국산 농산물의 해상 수출을 가능하게 한 흑해곡물협정의 중단을 선언한 것은 결국 서방의 제재 완화가 핵심 목표로 풀이된다.
17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크렘린궁은 이번 협정 중단과 관련해 "러시아 관련 사항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협정 중단 이유로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 관련 사항이 이행될 경우 언제든 협정에 복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지난해 7월 22일 유엔, 튀르키예와 흑해를 통해 자국산 농산물과 비료의 수출을 보장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우크라이나 역시 유엔, 튀르키예와 같은 내용의 협정을 각각 체결함으로써 흑해곡물협정이 성사됐다.
러시아의 문제 제기는 자국산 상품의 수출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것인데, 핵심 내용은 서방의 제재와 직결돼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제재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네트워크로부터 퇴출당했고, 이에 따라 세계 각국과의 금융 결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이 문제로 인해 농산물이 수출되지 않고 있다면서 SWIFT 재가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러시아 국영 농업은행에 대한 제재가 농산물 수출을 방해한다면서 제재 종료를 희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유엔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 농업은행이 자회사를 세운 다음 이를 SWIFT에 연결하는 방안을 절충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러시아는 이 같은 방안을 "실현 불가능하다"며 일축했다.
특히, 러시아 외무부가 "자회사 설립에 수개월이 걸리고 SWIFT 가입에 또 3개월이 걸리는데 네트워크 폐쇄는 몇 분이면 끝난다"고 지적한 것은 SWIFT 재가입만이 해답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러시아는 지난 4월 미국 정부가 JP모건체이스와 러시아 농업은행 간 거래를 일부 예외로 허용했으나 이후로도 협정과 관련한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조처는 곡물 수출 관련 결제만 일부 예외로 한 것으로, 러시아의 의도가 곡물 수출의 장애물 제거 이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으로 풀이됐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곡물 수출에 어려움이 겪고 있다는 주장에도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세계 식량안보 프로그램 국장 케이틀린 웰시는 러시아의 밀 수출량이 2022~2023년 4천500만t, 2023~2024년 4천759만t으로 최고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미 농무부의 전망을 근거로 "러시아 농업 부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협정 참여 중단이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타격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농업은 우크라이나 최대 산업 중 하나로, 전쟁 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되는 곡물의 75%가 흑해를 통해 운송됐다.
지난해 전쟁 이후 해상 수송로가 막힌 우크라이나가 유럽 육로와 강을 통해 곡물 운송을 추진했으나 기존에 비해 운송량은 크게 줄어들었고, 수출 과정에서 주변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 분쟁까지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지난해 말부터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문제 삼거나 협정 이행 여부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수시로 협정 참여를 중단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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