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종말 맞은 흑해곡물협정…세계경제 다시 혼돈 속으로
'식량 대국' 러·우크라 수출 보장해 전쟁 따른 식량난 해결에 기여
러, 협정 이행 이의 끝 탈퇴…세계식량시장 '먹구름'
러 제재 완화시 협정재개 여지…향후 전망 여전히 불투명
(이스탄불=연합뉴스) 조성흠 특파원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중에도 양국 농산물이 흑해를 통해 안전하게 수출될 수 있도록 한 흑해곡물협정이 17일(현지시간) 체결 1년을 앞두고 러시아의 탈퇴로 결국 종료됐다.
흑해 곡물 협정은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전쟁 이후 벌어진 세계 식량난 완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이번에는 종료를 피하지 못하면서 위기 재연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 관련 협정 사항이 이행된다면 협정에 복귀할 것이라고 했으나,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싼 서방의 제재와 직결된 문제로서 근본적 해결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 전쟁 중 극적인 협정체결…세계 식량난에 '단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유럽과 세계 안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동시에 세계 식량 시장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왔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와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자 세계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전쟁 발발 이후 밀 선물 가격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식량가격지수는 지난해 3월 159.7포인트로 역대 최고치를 새로 썼다.
여기에 코로나19 회복세에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까지 겹쳐 세계 각국의 물가고가 극심해졌고, 일부 개도국에서는 민생고가 정국 불안으로까지 번졌다.
이에 따라 유엔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식량 수출을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양국과 우호적 관계인 데다 흑해 관할권을 가진 튀르키예가 참여하면서 지난해 7월 이스탄불에 협상장이 마련됐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7월 24일 흑해 항로의 안전 보장과 협정 이행을 맡을 이스탄불 공동조정센터(JCC) 설치를 골자로 한 흑해곡물협정에 합의했다. 이후 8월부터 우크라이나 3개 항만의 봉쇄가 풀리고 선박을 통한 곡물 수출이 재개됐다.
전쟁 발발 후 5개월여 만에 다시 세계 시장에 풀린 우크라이나 곡물은 식량 시장의 '단비'가 됐다.
세계식량계획(WFP)은 협정 체결 직후 72만5천t에 달하는 인도주의적 식량 원조를 에티오피아와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에 전달했다.
협정 체결 이후 지금까지 3천290만t의 우크라이나 곡물이 수출됐고 이 중 절반 이상은 WFP의 지원을 받는 개도국에 공급됐다.
FAO 식량가격지수는 지난 3월 기준 127.2로 지난해 3월 이후 12개월째 하락세를 기록하는 등 세계 식량 가격도 점차 안정되고 있다.
◇ 러, 작년 말부터 '어깃장' 끝에 종료 선언으로 위기 재연
그러나 순항하는 듯했던 협정은 지난해 말부터 러시아의 이의 제기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흑해 곡물 협정의 항로를 악용해 크림반도의 자국 흑해 함대를 공격했다면서 협정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한때 선박 218척이 우크라이나 항만에 발이 묶였으나,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받았다고 밝히고 협정에 복귀했다.
이후 러시아는 협정의 두 번째 연장을 앞둔 올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협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국 곡물과 비료 수출이 제한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본 4개월로 정해진 협정 기한을 2개월 연장에만 합의한 것이다.
유엔은 서방의 복잡한 대러 제재 구조 때문에 러시아 곡물과 비료 수출이 제약받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후 2개월이 지난 5월에도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협정을 탈퇴할 수 있다고 위협하다 기한 만료일에서야 2개월 연장에 다시 합의했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여러 차례 선박 검사를 거부하면서 협정 이행이 며칠씩 중단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결국 협정 중단이라는 강수를 두면서 세계 식량 시장에 다시금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막시모 토레로 FAO 수석 경제학자는 AP에 "협정 파기 시 세계 식량 가격은 분명히 급등할 것"이라며 "다만, 급등 기간은 시장의 반응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 러, 금융제재 완화 시 복귀 가능성…전쟁 중 근본 해결은 난망
러시아는 협정 종료 선언에도 불구하고 "자국 관련 협정 사항이 이행될 경우 즉시 협정에 복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핵심 쟁점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완화 여부다.
러시아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당하면서 국제 결제 업무에 지장을 받고 있다.
서방은 식량과 비료 수출은 해당 제재에서 예외라는 입장이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자국산 식량과 비료가 제대로 수출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유엔과 유럽연합(EU) 등이 러시아 국영 농업은행이 자회사를 세우고 이를 SWIFT에 연결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러시아는 이 같은 제안을 실현 불가능한 안이라고 일축했다.
해당 제안이 거부된 상황에서 서방이 새로운 절충안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할 경우 러시아가 협정에 복귀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만, 러시아가 극적으로 협정에 복귀한다고 해도 향후 흑해 항로의 안전이 완전 보장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제 협정이 완전히 이행되고 준수되기 어렵다는 것은 지난 1년간 이번 협정의 이행 과정을 통해 확인됐다. 향후 전쟁의 전개에 따라 러시아가 새로운 요구 조건을 들고 나오거나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시몬 에브넷 스위스 장크트갈렌 대학교 교수는 AP에 "이런 상황에서 국가들이 제재 변화를 위해 가진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josh@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