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몽니, 거칠어지는 '전투외교'…흑해곡물협정도 중단 위기
17일 자정 시한 앞두고 어깃장…지구촌 식량난 볼모로 잡아 서방 압박
최근 시리아 구호도 차단…"'원하면 세계 불태울 수 있다' 메시지"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전의 교착 속에 국제무대에서 어깃장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전세가 유리하게 풀리지 않고 국제적 고립이 점점 심화하자 노골적인 국제협력 훼손을 지렛대로 삼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뒤따른다.
푸틴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자정에 만료되는 흑해곡물협정을 연장하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전날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대러시아 제재의 완화가 필요하다며 이 같은 태도를 취했다.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가 작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전쟁터로 돌변한 흑해에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선이 안전하게 다니도록 한 합의다.
곡물선은 우크라이나의 안내에 따라 지정된 항로를 지나 튀르키예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세계 시장으로 나간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 항구에서 오가는 곡물선을 붙들어 무기운송 등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는지 검사한다.
작년 7월에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 하에 처음으로 타결된 이 협정 덕분에 농업대국 우크라이나는 그간 세계에 곡물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그 때문에 협정이 효력을 잃도록 할 수 있다는 러시아의 으름장은 세계 식량사정을 볼모로 한 협박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등 5개 유엔 산하 기구들이 지난 12일 발간한 식량 안보·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식량 사정은 악화하고 있다.
작년에 굶주림에 직면한 세계인구는 평균 7억3천500만명, 식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인구는 24억명에 달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흑해곡물협정이 발효된 이후 밀, 옥수수 등 3천280만 톤(t)의 식량을 수출해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식량난을 완화했다.
수출된 곡물의 양을 보면 저개발국은 전쟁 전과 다름없었고 고소득국, 중소득국에는 밀과 옥수수 수출량이 90%, 60% 정도로 감소했다.
흑해곡물협정이 중단되면 저개발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도 식량 가격 상승으로 민생에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지구촌 대다수 국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기 이후로 이미 급격한 물가 상승에 시달려왔다.
로이터 통신은 흑해곡물협정이 적용되는 마지막 곡물선이 16일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를 떠나 공급이 잠정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앞서 3차례 흑해곡물협정 시한이 닥쳤을 때도 회의적 태도를 취하다가 막판에 연장에 동의했다.
특히 러시아는 전략 요충지인 점령지 크림반도에 대한 무인기 공습을 이유로 들어 작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협정 참여를 중단한 적도 있었다.
러시아의 이번 몽니와 관련해서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최근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가 주목된다.
나토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더 신속하게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러시아 침공에 맞서 싸울 군사지원을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은 열어주면서 자국 농산물과 비료의 수출은 제재받는다는 점을 협정 연장에 반대하는 사유로 제시한다.
푸틴 대통령은 라마포사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제재 차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곡물이 저개발국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다만 유엔 소식통을 인용해 협정이 막판에 극적으로 연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상황을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세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데다가 내부에서 무장반란까지 접한 뒤 대외정책 기조가 더 강경해진 면이 있다.
앞서 지난 11일 푸틴 대통령은 지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시리아에 구호물품을 보내는 결의안 연장을 거부했다.
그는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반군이 아닌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통해 구호품이 배급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이미 12년 지속된 내전, 올해 2월 강진 피해로 고통을 받아온 시리아 내 반군 장악지역 주민들의 민생은 더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푸틴 정권이 전투를 방불케 하는 외교에 돌입했다고 진단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리처드 고원 유엔국장은 러시아가 국제협력에서 까칠함을 넘어 전면적 방해로 태세를 바꿨다고 관측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너태샤 홀 선임연구원은 "푸틴이 원하면 세계를 불태워버릴 수 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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