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공산군 징집 피하려다 유엔군 합류…동족상잔 환멸에 '제3국행'
벨기에군 배속 故 채영호 씨…파란만장한 사연 한국 언론 첫 소개
벨기에서 의학박사 승승장구에도 "평생 내면의 아픔 안고 살아"
수백쪽 '미완의 자서전', 70년전 신분증까지 사료 '빼곡'…작년 갑작스레 별세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가족들은 이 전쟁이 잘못될 경우 그날이 내 손을 잡는 마지막 날일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나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지만,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며칠 뒤 돌아오겠다는 불확실한 약속만 되풀이 했다.'(2000년, 고(故) 채영호씨 기록물 중)
황해도 해주에 있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스무살 청년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북녘의 고향 땅을 잠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북한 공산군 징집을 피하려다 남녘 땅에서 체포돼 결국 유엔군 깃발 아래 벨기에 대대에 배속돼 참전한 고 채영호 씨의 얘기다. 그의 사연이 한국 언론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부인 리아 데바우버르(76) 씨는 23일 연합뉴스에 밝혔다.
데바우버르 씨에 따르면 채 씨는 생전 남긴 기록물에서 "내가 전방에 간다면 나는 내 조국이 아닌 강대국들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될 것이 분명했다"고 적었다.
채 씨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일본학교에 다녀야 했고, 동시에 유학자였던 조부의 영향으로 열강의 침략 및 전쟁에 대한 반감도 강했다.
그러나 '임시 피신' 작전은 그의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다. 당시 채 씨처럼 도주한 젊은 청년들을 붙잡으려는 공산군의 포위망이 전방위로 조여왔다.
결국 채 씨는 집에서 챙겨준 임시 식량, 돈 등 모든 짐을 버리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선에 의해 구조돼 목숨을 건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닿은 육지는 38선 이남이었다.
당시 채 씨 또래 남성은 대부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내려온 간첩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채 씨도 순찰하던 남한 당국에 체포돼 구금 시설에 수감됐다.
그러다 당시 유엔군이 병력 충원을 위해 수감된 이들을 일시에 석방하기로 하면서 풀려났고, 당시 영어, 일본어, 한국어에 능통해 결국 벨기에 대대 통역요원으로 배치됐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기 싫어 고향에서 탈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에 발을 들이게 된 셈이다.
벨기에 대대에서 그는 한국군과 벨기에 간 통역 임무를 보조했고, 의학 공부 경험 때문에 의무팀도 보조했다. 처음엔 불어를 못했지만, 어학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벨기에 대대에서 근무하며 불어도 습득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뜻하지 않게 벨기에인들과 인연도 자연스레 깊어졌다.
특히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가 '제3국행'을 결심하도록 한 것도 당시 벨기에 적십자사의 한국 파견임무단 대표 알프레트 쥘리앵 프랑크와 만남이 계기가 됐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당시 프랑크 대표가 당시 채 씨에게 서방 국가로 떠나 의학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채 씨는 "당시 나의 조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희망이 없어 보였고, 나 역시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권유대로 모험해보기로 결심했다"고 생전 기록했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벨기에 땅을 밟은 그는 현지 다수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외과학을 전공했다.
1970년대 초반 벨기에 국적을 취득한 뒤에는 정형외과학 전문의로 활동했고, 독일 쾰른에 있는 벨기에 군사병원에서 근무 중 데바우버르 씨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
은퇴 이후에도 간이식 수술 연구에 몰두하는 등 의료인으로서는 남부럽지 않은 길을 살았지만, 늘 마음 한쪽에 '우울감'을 안고 살았다고 데바우버르 씨는 떠올렸다.
"남편은 평생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어요. 어릴 적 그렇게 부유했다는데, 전쟁으로 남은 가족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하게 살았을 것 같다면서 매우 힘들어했죠."
전쟁 당시 뿔뿔이 흩어진 일부 친지들과는 지난 2000년 연락이 닿았지만, 평생을 그리워한 어머니에 대한 소식은 결국 듣지 못했다.
채 씨가 약 10년 전부터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엔 주변 권유로 펜을 들었지만, 한 권 한 권 쌓여가는 기록들을 보면서 언젠가 통일되면 고향 땅에 책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유달리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 덕분에 1950년대 발급받은 신분증·통행증 등 그의 인생 발자취가 담긴 거의 모든 공문서가 앨범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데바우버르 씨가 기자에게 보여준 각종 사진과 사료 등만 해도 수백여점에 달한다.
그러나 그는 작년 8월 갑작스레 쓰러지면서 평생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92세의 나이로 끝내 눈을 감았다.
곧 채씨의 1주기를 앞두고 부인 데바우버르 씨는 '미완'으로 남은 남편의 자서전을 의미 있게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는 "남편이 일본학교에서 교육받은 영향으로 거의 전부 일본어로 기록해놔서, 벨기에 루벤대의 한 교수가 불어로 번역해주겠다고 했다"며 "남편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번역해 줄 전문가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직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남편이 남긴 기록들이 잘 정리돼 보전됐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shi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