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AI규제' 베끼다간…아톰 보며 쌓은 내공 믿어볼까 [이광빈의 플랫폼S]
'거대 빅테크 견제' EU AI 규제안 마지막 단계…불만 쏟아낸 올트먼
"국내 규제안, 해외 선례 따라가다 스타트업 시장 위축될 수도"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 아톰이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녀도 되는가. 아톰이 사람을 인질로 삼은 악당을 포로로 잡지 않고 위해를 가할 것인가.
한국에선 1970년대에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은 인공지능(AI) 기반 로봇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역시 인기리에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도 마찬가지다. '영생을 위해 영혼을 버리고 기계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오래전에 던져졌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AI 규범 문제에 관심이 형성돼왔다. 일본인공지능학회는 2017년 AI 윤리 지침을 만들기도 했다. 선진국 가운데 빠른 움직임이었다.
일본보다 늦긴 하지만, 이런 애니메이션들이 방영된 우리나라에서도 AI 윤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형성돼왔다.
애니메이션 외에도 1982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등은 당시 인간화된 AI와 관련해 화두를 던졌다. 국내 만화로는 작가 김준범의 1989년작 '기계전사 109'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작품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를 보여줬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1984년작 '터미네이터'는 앞선 작품들과는 시사점에서 결이 다소 다르다. AI가 인류를 파멸로 몰 수 있다는 경고를 깊숙이 심어줬다.
지난해 말부터 챗GPT가 생성 AI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뒤 AI 규제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발등의 불이 됐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스티브 워즈니악, 유발 하라리 등 유명 인사들이 AI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이들은 AI 개발을 6개월 동안 일시 중단하고선 안전 규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AI 규제에는 윤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적, 군사적, 지정학적 패권 경쟁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빅테크'들은 AI 서비스 선점 경쟁 속에서 규제 문제를 활용해 경쟁 기업에 견제구를 날리기도 한다. 머스크의 AI 개발 유예 주장에는 AI 후발주자가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가 섞여 있다는 의구심이 일었다.
우리나라도 AI 규제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AI의 부작용을 막을 뿐만 아니라 산업적 선도를 위해서도 AI 규제는 뒤처져서는 안 되고 선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문제다.
◇ AI 규제안 확정 앞둔 EU…민감해하는 미 '빅테크'
AI 규제 법제화의 필요성은 지난해 말부터 불어닥친 챗GPT 열풍으로 커졌다. 유럽연합(EU)의 AI 규제가 가시화되면서는 발등의 불이 됐다.
유럽의회는 지난달 14일 EU 전역에서 AI를 규제하기 위한 입법안을 가결했다. EU 집행위원회가 초안을 발의한 지 2년 만이다. 논의가 지지부진하다가 역시 챗GPT 열풍에 등 떠밀렸다.
이제 유럽의회와 집행위원회, 역내 27개국을 대표하는 이사회가 3자 협상을 통해 마지막으로 입법안을 조율한다. 순조롭게 협상이 이뤄지면 2026년 전후 시행된다.
챗GPT 등장은 EU의 AI 규제안 내용까지 바꿔버렸다. 애초 교통, 의료, 금융, 인사 등 인간의 감시·감독이 필요한 '고위험' AI를 사용할 경우 부작용을 막기 위한 취지로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챗GPT로 AI 사용 영역이 늘어나고 새로운 부작용이 돌출하자 규제 범주가 넓어졌다.
현재 입법안의 주요 내용으로, AI 창작물이 반드시 AI에 의해 만들어진 점을 명시해야 한다. 특히 '고위험' AI는 원천 데이터의 저작권을 반드시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빅테크들은 저작물 공개에 가장 민감해한다. 최근 개발됐거나 출시 예정인 생성 AI 서비스들이 '고위험' AI로 분류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AI 개발에 사용된 데이터의 출처를 공개해야 하는 셈인데, 빅테크들은 이에 극도로 민감해한다. 공개할 경우 무단 데이터 사용에 따른 수많은 소송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 한다는 분석이다. 물론 창작물에 저작권을 가진 예술가와 학자, 미디어 등에는 자신도 모르게 침해당한 권리를 행사할 기회일 수 있다.
◇ 미국의 IT 서비스 '식민지' EU, AI 규제 강화하는 까닭은
그러면 왜 EU는 AI 데이터 출처를 공개하는 규제를 추진할까. 전문가들은 빅테크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분석한다. 유럽 지역은 IT 서비스들이 대체로 실리콘밸리에 종속돼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트위터, 아마존 등 미국의 빅테크가 유럽 대륙을 잠식해 들어간 지 오래다. 생성 AI 서비스 역시 미국 빅테크가 시장을 선점해 들어가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 AI 최고경영자는 최근 런던에서 EU의 규제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올트먼은 서비스 '운영 중단' 가능성까지 시사했다가 파장이 커지자 번복하기도 했다.
올트먼 뿐만 아니라 미국 빅테크는 AI 기술 발전과 위험성의 균형을 찾는 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EU에 신중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도 AI 규제에 나서고 있다. 2018년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를 탈퇴했던 미국은 AI 규제 문제 탓에 최근 5년 만에 재가입하기도 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 요청에 따라 작성된 유네스코의 AI 관련 보고서가 글로벌 AI 규제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은 지난 5월 청문회를 열고 올트먼을 불러 AI 규제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AI 규제 기관 신설을 통한 규제 방안 등이 미국에서 논의 중인데, EU 등에 비해서는 움직임이 더딘 편이다. 전반적으로 생성 AI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빅테크들과 보조를 맞추는 인상이다.
미국 내 지역별로 규제가 이뤄지기도 한다. 뉴욕시는 지난 5일 AI 채용 규제안을 내놓았는데, AI가 채용 전형 과정에서 성이나 인종을 차별하는 분류 기준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 우리 규제 논의는…"잘못했다간 토종 스타트업 싹 잘라"
우리나라에서도 AI 규제 논의가 한창이다. 정부 단위에선 전문가 협의체인 '인공지능 법제정비단' 등이 규제안을 논의 중이다.
국회에선 기존 7개 법안을 합친 '인공지능산업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안'이 심사를 받고 있다. 과방위 소위를 통과한 상태다. AI 산업 진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고위험' AI와 관련해 사업자에게 의무를 지우는 내용도 들어 있다.
개인정보와 관련해서도 처리 기준 등도 마련 중이다. AI 알고리즘으로 개인정보가 유출될 경우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해당 알고리즘을 제출받아 볼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민주당 김영배 의원이 발의한 상태다.
국내에서도 논의가 활발하지만, 선진국 가운데 앞서 나온 EU 규제안은 다른 국가들에 상당히 참고가 될 수밖에 없다. 자칫 EU 규제안을 따라갈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럽 지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토종' IT 서비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생성 AI 분야에선 미국의 빅테크에 비해 후발 주자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은 올 하반기부터 생성 AI 서비스들을 내놓을 예정이다. AI 관련 스타트업들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I 규제안이 세심하게 설계되지 않으면 우리 서비스를 옥죄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국제적인 협력으로 AI 규제 방향성을 논의하는 움직임이 빨라지는 가운데, 국제 규제를 선도할 필요성도 제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규제가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생성AI 혁명' 저자인 강정수 미디어스피어 이사는 10일 통화에서 "EU 규제안은 부익부 빈익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미 거대언어모델을 가지고 있는 돈 많은 빅테크의 AI 서비스를 규제하면, 스타트업의 시장 진입을 막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스타트업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한국의 AI 규제 논의는 이러한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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