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 나눠먹기 R&D 이번엔 손볼까…분야·성격 놓고 의견 분분
인맥 통한 R&D 나눠먹기·'좀비기업 양산' 기업 R&D 등 지적
부처·분야별 나눠먹기도 눈총…지속 언급에도 성과 없자 질책 나섰단 해석도
(서울=연합뉴스) 조승한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 먹기, 갈라먹기식 연구개발(R&D) 투자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과학기술계가 긴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R&D 분배 문제에서도 교육계 이권 카르텔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가운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상 처음으로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 내역 제출 법정기한을 넘기면서까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2일 과학계에 따르면 R&D 나눠 먹기는 매번 정부마다 R&D 개편을 논의할 때 들고나오는 단골 소재로, 이번 지시가 어떤 문제를 지적한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표적으로는 이른바 연구자들끼리 카르텔을 구성해 과제를 기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맥을 통해 연구비를 배분하는 사례가 꼽힌다.
이런 과정에서 수행 과제수를 연구책임자 3개 이내, 참여연구자 5개 이내로 제한하는 '3책5공' 기준에 맞춰 연구실이나 기관끼리 배분식으로 이름을 올리는 사례들도 심심치 않게 있어 왔다.
한 대학 교수는 "대형 과제에 관여하기 위해 과제를 기획하는 연구자나 기관에 접촉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국가 R&D 사업 전반 감사를 시작한 감사원이 연구관리기관의 연구 평가위원, 과제 수행자를 들여다보고 연구인력 적정 배분을 분석하겠다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이 뒷받침된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 대상 정부 R&D도 나눠 먹기 표적으로 꼽힌다.
특히 정부 R&D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이른바 '좀비 기업'을 양산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1년 KISTEP이 발간한 '중소기업 R&D 지원 방식의 주요 이슈와 정책제언'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8년까지 R&D 지원을 받은 좀비기업은 882곳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이런 좀비기업뿐 아니라 정부 R&D를 계획적으로 반복해 타내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이들 기업이 3회를 넘겨 지원받으면 R&D 지원금이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일부 컨설팅 기업들은 정부 지원 R&D 사업이 갚지 않아도 되는 '무상지원금'이라며 혁신적 기술이 아니어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홍보하는 등 이른바 '눈먼' R&D를 노리는 기업들이 계속해 늘고 있다.
이 밖에도 과제들을 골고루 배분하기 위해 과제를 쪼개 규모를 줄이는 경우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에 지난해 기획재정부는 2023년 예산안을 공개할 당시 성과가 저조한 소규모·나눠먹기식 사업 지원을 줄이겠다며 생애기본연구 등 연구 안전성을 보장하는 개인연구, 중소기업 나눠주기식 사업 등을 집어 감액하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엔 공감하면서도 전면 재검토가 필요할 만한 상황인지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분야마다 연구인력 풀이 한계가 있는 만큼 연구를 잘하고 성과가 좋은 연구자들이 결국 연구비를 많이 가져가게 된다며 이를 무조건 비판할 순 없다는 것이다.
또 R&D 예산배분에 있어 이를 막기 위한 조정장치가 꾸준히 늘어 온 만큼 과거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나온다.
과학계 한 인사는 "과학기술 분야가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카르텔'이라고 할 만한 요소는 가장 적지 않은가 한다"면서도 "아마 변화를 요구했는데 그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강력한 대응이 나온 것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부처 간 칸막이도 R&D 나눠 먹기를 유발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반도체, AI 등 기술이 새롭게 주목받을 때마다 여러 부처가 경쟁적으로 R&D 예산을 늘리다 보니 비슷한 사업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반복되지만, R&D 조정을 담당할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이런 조정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위상이 약하다 보니 중복 예산이 집행되곤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경쟁적으로 반도체 분야 대학과 대학원을 선정해 각자 지원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대학들이 이런 사업들을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어 예산 집중을 통해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져 왔다.
이번 대통령의 언급이 분야별 독식을 꼽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대통령실에서 꾸준히 양자, 우주 등 새로 부상하는 국가전략기술에 집중 투자를 요구해 왔는데, 이번 R&D 조정안이 과거 관행대로 전 분야에 걸쳐 고른 투자를 하면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R&D 전문관리기관과 간담회를 열며 '나눠 주기식 예산배분'보다 국제적 경쟁력을 기준으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전략적 예산배분'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국정과제라고 강조하기도 했는데, 1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구체적 성과가 나지 않은 점을 질책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지난해부터 R&D 나눠먹기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대통령실에서 나왔고 감사원도 지난해부터 감사 예고 등을 통해 R&D 개선 방향을 지켜보겠다는 신호를 냈지만, 이번 예산 조정안에서 확실한 대책이 보이지 않자 '기강 잡기'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편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계속해서 요청했던 부분"이라며 "부처에서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재정전략회의 안건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어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shj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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