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 30년 지난 삼성 현주소는
7일 故 이건희 '신경영 선언' 30주년…'글로벌 삼성' 밑거름
별다른 기념행사는 없을 듯…복합위기 속 이재용 '뉴삼성'에 주목
(서울=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 전 세계 수백명에 달하는 삼성 임원을 불러 모은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선언했다.
훗날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계기라고 평가받게 된 '신경영 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 '신경영 선언' 30주년…세계 일류 기업 도약
4일 재계에 따르면 오는 7일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30주년을 맞는다.
당시 세탁기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것을 보고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며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1995년에는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하며 근본적인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양(量)을 중시하던 기존의 경영 관행에서 벗어나 질(質)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은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1996년 1기가 D램을 개발하며 반도체 선두 기업의 토대를 닦았다.
이건희 회장의 '인재 제일' 철학에 따라 1993년 국내 최초로 대졸 여성 신입사원 공채를 신설하고 1995년에는 공채 학력 제한을 없앴다. 국내 기업의 출퇴근 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이른바 '7·4제'(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삼성전자[005930]의 2022년 브랜드 가치는 877억달러를 기록하며 3년 연속 글로벌 5위에 올랐고, 스마트폰과 TV, 메모리반도체 등 20여개 품목에서 '1위'를 하는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 이재용 '뉴삼성'은…경영 보폭 넓히고 '상생' 강조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는 올해 별다른 행사 없이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에는 기념행사를 열거나 사내 방송 등을 통해 이날을 기념했지만, 이미 이재용 회장 체제로 전환한 데다 과거 이벤트보다는 글로벌 복합 위기 상황에서 미래 먹거리 확보 등에 주력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는 회장 취임 8개월차에 접어든 이재용 회장의 '뉴삼성' 비전에 주목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취임 후 전방위적으로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달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 일정을 소화한 뒤 미국 동·서부를 횡단하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등 주요 글로벌 기업 CEO 20여명을 두루 만나고 돌아왔다.
취임 후 광주를 시작으로 지방 사업장을 두루 돌며 생산 현장을 점검하고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해 상생의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며 상생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지역 산업 생태계 육성을 위해 향후 10년간 총 6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대표적인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업인 스마트공장 구축을 통해 인구소멸 위험 지역에 있는 중소기업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 1일 열린 삼성호암상에 직접 참석하는 등 선친의 '인재 제일' 철학을 계승하며 인재 육성·확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 회장을 비롯한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족은 2021년 유산의 약 60%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른바 '이건희(KH) 유산'으로, 유족은 문화재와 미술품 2만3천여점을 국가기관 등에 기증하고, 감염병 극복(7천억원)과 소아암·희귀질환 지원(3천억원) 등 의료 공헌에 1조원을 기부했다.
◇ 글로벌 복합위기 속 과제 산적…M&A는 언제
그간 고비 때마다 미래를 내다본 선대회장의 결단으로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라선 삼성전자지만,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와 산업 재편 가속화 등으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했다.
경기 침체로 IT 수요가 급감하고 재고가 쌓이면서 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는 바람에 반도체 업황은 악화했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95.5% 급감한 6천402억원에 그쳤다. 특히 반도체 부문은 4조5천800억원의 적자를 내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여기에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갈수록 격화하며 미중 사이에 낀 국내 반도체 업계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이 회장 취임 후 업계에서는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으나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은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M&A는 2017년 미국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 인수가 마지막이다.
재계 관계자는 "'신경영 선언' 당시와는 경영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며 "이제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처음부터 키우기보다 M&A를 통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몸집을 키울 때"라고 말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회장도 이건희 선대회장처럼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며 '뉴삼성'의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 가능성이 재점화되기도 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사법 리스크에도 실적 개선을 통해 주주가치 증대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이라며 "실적 악화기에 책임경영 필요성은 오너 일가의 등기임원 복귀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사법 리스크 등을 고려하면 등기임원 복귀를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 회장은 현재 매주 목요일에는 삼성물산[028260]-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 재판에, 3주 간격으로 금요일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분식회계 의혹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hanaj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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