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숙의 집수다] 수술대 오르는 전세제도, 그 운명은

입력 2023-06-01 06:03
[서미숙의 집수다] 수술대 오르는 전세제도, 그 운명은

전세종말론·전세사기에 '흔들'…1천조원 넘는 전세보증금

원희룡 장관 "수명 다했다" 발언에 국토부 제도개선 착수

정부 "인위적 폐지는 없다" 선그어…무자본 갭투자 차단 주력할 듯

에스크로·전세가율 제한 등 거론…"규제보단 임차인 보호에 집중해야"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마무리되면서 정부는 이제 '전세제도 손질'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전셋값 하락으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임차인의 피해가 사회 문제로 비화하자 이참에 불안전한 전세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정부는 임대차 3법 개선과 함께 전세제도 전반을 손질하겠다는 입장인데, 지금 속도로 봐선 임대차 3법보다 전세제도 보완 방안이 먼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전세제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 60년 이상 이어온 전세…최근 월세에 추월당해

전세제도는 오랜 기간 임대인의 사금융으로, 임차인의 주거사다리로 존속해왔다.

집주인은 세입자로부터 전세 보증금을 받아 금융기관에 넣어 이자를 얻거나 지렛대 효과를 이용해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임차인은 임대료 부담 없이 보증금을 맡겼다가 계약 만기 후 돌려받는 식으로 주거비 부담을 줄여 내집 마련의 발판으로 삼아온 것이다.

전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주택임대차 계약 형태로 알려져 있지만, 학자들 연구 논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2015년 국토연구원 정기 간행물에서 전세제도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계약 형태이며, 인도와 볼리비아 등의 국가는 현재도 전세제도를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의 전세제도는 조선시대를 넘어 고려시대에도 유사 형태의 계약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현재의 전세제도가 급속히 확산한 것은 전후 경제개발과 도시화가 본격화한 1960년대 이후로 전해진다.

1970∼1980년대는 전국적으로 '집 장사'가 유행하며 연립·다세대 등을 신축해 전세를 놓고 그 보증금을 발판으로 또 다른 '집 장사'를 하는 형태가 널리 확산했다.

그렇게 팽창해온 전세제도는 장기 시계열상 2010년 이후로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보증부 월세 시장의 확산 때문이다.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와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2020년 기준 임대가구 비중은 38.2%로, 이 가운데 순수 전세는 15.2%, 월세(보증부 월세 포함)는 23.0%로 월세 비중이 훨씬 높다.

1995년까지만 해도 전세가 29.7%, 월세는 전세의 절반 수준인 14.5%에 불과했는데, 2010년을 기점(전세 21.5%, 월세 21.7%)으로 월세가 역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대 초반은 정부 규제로 집값은 하락하는데 전셋값은 뛰던 시기다. 또 저금리가 장기화하면서 은행에 목돈을 넣어놓느니 월세를 놓겠다는 집주인이 늘고, 이때부터 '전세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등장했다.

2014년 19.6%로 내려간 전세 비중은 2016년 15.5%로 떨어진 뒤 최근 5년 이상 15% 초반대 비중이 지속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강화, 임대차 2법 시행 후 전셋값 급등은 월세 시장 확대를 가속화했다.

그러나 '전세 종말론'이 나온 지 10년이 됐지만 우리 경제에서 전세가 차지하는 시장 규모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순수 전세는 물론 전세금의 일부는 보증금 형태로 남겨놓는 보증부 월세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총 전세 보증금 규모를 전세 보증금 부채와 준전세(보증금이 월세의 240개월치 초과) 보증금 부채의 합으로 추정한 결과, 국내 전체 전세 보증금 규모는 작년 말 기준으로 1천58조3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2017년 말 770조9천억원에서 5년 만에 287조4천억원(37.3%) 증가한 것이다. 전세신고가 이뤄지지 않아 통계에 빠져있는 사각지대까지 고려하면 실제 보증금 규모는 이보다 더 클 전망이다.



◇ "전세 수명 다했다" 발언에 시장 술렁…갭투자 차단으로 방향 전환

이런 가운데 주택·부동산 정책의 수장인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던진 한마디는 시장에 파장을 일으켰다.

원희룡 장관은 지난달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세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질문에 "전세제도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해온 역할이 있지만 이제 수명을 다한 게 아닌가 본다"고 답해 전세 폐지론에 불을 댕겼다.

시장에선 "전세를 없애면 모든 세입자가 강제로 월세로 살아야 하느냐, 임대인은 막대한 보증금을 다 내줘야 하느냐"며 논쟁이 일었다.

원 장관에 우려의 목소리가 전달된 것인지, 그는 지난주 해외 출장지에서 "전세를 제거(폐지)하려는 접근은 하지 않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대신 "전세 대출을 끼고 갭투자를 하고, 경매에 넘기는 것 빼고는 보증금을 돌려줄 방법이 없는데도 천연덕스럽게 재테크 수단인 것처럼 얘기되는 부분은 손을 봐야 한다"고 방향을 틀었다.

무자본·무한 갭투자를 막는 쪽으로 대안을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원 장관의 해명에 앞서 부동산 정책 파트너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한준 사장도 거들었다.

이 사장은 "인위적으로 정부가 전세제도를 없애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장관의 의중은 전세제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보다 갭투자가 악용돼 전세 피해자들이 나오니 제도적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원 장관은 "전세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정부 출범 공약으로 발표한 임대차 3법과 함께 임대차 제도 전반에 걸친 개편을 예고한 상태다.

현재 국토연구원이 수행 중인 임대차 3법 개선 용역은 내년 2월까지다. 그러나 전세제도는 내년 총선 출마설이 도는 원 장관 임기 안에 먼저 공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국토부 관계자는 "전세제도 자체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전세제도를 악용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많은 집을 사고, 임차인이 피해를 보는 부작용은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했다.



◇ 에스크로·보증금 상한제 등 '백가쟁명'…임차인 보호 기반 마련해야

지금도 일부 전문가들은 유튜브에서 전세제도와 전세자금대출이 갭투자 증가로 이어져 집값 상승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전세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제도 폐지는 시장에서 선택돼야 할 문제이지 정부가 강제해선 안된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비싼 월세 부담이 없으니 임차인의 주거 안정과 내집 마련을 돕는 주거사다리 역할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1천조∼2천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보증금 반환 문제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대출 등 금융시스템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국토부 고위 관료 출신인 모 대학 교수는 "오랜 관습처럼 여겨온 제도를 하루아침에 없애면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과 충격이 더 클 것"이라며 "보증금 미반환, 전세사기에 대한 대비책을 찾아야지 전세 자체의 폐지하거나 제약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단 정부는 전셋값 하락 시 임차인의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집주인의 무한대 갭투자를 막는 쪽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수단이 '에스크로'(escrow·결제대금 예치) 제도다.

에스크로는 전세 보증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3의 기관(신탁사나 보증기관 등)에 예치하고, 집주인은 그에 대한 이자를 받는 방식이다.

국토연구원 박진백 박사는 "전세 보증금을 모두 에스크로에 넣으라고 하면 그건 전세를 놓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며 "다만 보증금 미반환 문제 해결을 위해 보증금의 10∼30%가량 제한적으로 에스크로에 예치하는 것을 검토할 만하다"고 말한다.

전세 에스크로를 이용하면 집을 살 때 집주인의 자기자금 투입비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무한대의 무자본 갭투자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 장관은 에스크로 제도에 대해선 일단 "도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듯했으나 "위험도 높은 부분에 부분적으로 에스크로를 도입하거나, 변형해서 쓸 수도 있다"며 일부 도입 가능성에 대해선 문을 열어놨다.

무한 갭투자를 막는 방법으로 전세 보증금을 매매가의 70% 이하로 규제하는 '전세 보증금 상한제'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경기대 김진유 교수는 "전세가율 70%를 적용해 보증금을 규제하고, 나머지 금액은 월세로 전환해 계약하게 하면 최소 30%만큼 버퍼(완충지대)가 생겨 전셋값 하락에도 깡통전세를 막을 수 있고, 집주인에 대해선 최소 30%만큼 자기자본 투입이 필요해 무자본 갭투자를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차인 보호 수단인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제도를 확대하는 것도 방법이다.

현재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등록 임대사업자에만 의무적으로 적용하고 있는데, 이를 일반 임대 계약자나 보증금이 일정 전세가율 이상인 고위험 계약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임대차 계약기간이 절반이 지난 경우에도 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든 전세와 임대인에 대한 지나친 규제는 전세 공급 급감 등 임대차 시장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양대 이창무 교수는 "전세제도의 운명은 시장에 맡기되, 정부는 보증금이 많은 임대계약의 위험성이 드러난 만큼 이를 보완하는 제도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며 "임차인의 월세 부담이 커지는 문제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전세 보증금을 줄여가는 방법도 고민해볼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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