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막대한 희생 끝 바흐무트 점령했지만…"오히려 독 될 것"
전략적 가치 없는 폐허 지키려 병력낭비 계속될 듯
바흐무트에 발 묶인 채 우크라 '대반격' 시작되면 진퇴양난 될 수도
러 바그너그룹 용병 전력은 이미 완전 소진…"다른 전투 힘들다"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년 가까이 전투가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최격전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가 막대한 희생 끝에 승리를 선언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선 오히려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만간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될 터인데,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에 노출된 폐허에 불과한 이 도시를 계속 점령하려면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밀어 넣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의 바흐무트 점령은 러시아 정부에게는 강력한 상징적 승리가 될 것"이라고 21일(현지시간) 평가했다.
러시아 입장에선 작년 여름 리시찬스크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도시 점령에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탄약과 정예병 상당수를 희생해 바흐무트를 지키려 했던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선 실패가 아닐 수 없다고 이 매체는 지적했다.
실제 러시아 국영 TV 방송과 친(親)크렘린계 신문들은 바흐무트에서의 승전 소식을 현지 특파원발 보도 등으로 전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심지어 방송 인터뷰에 응한 일부 병사들은 바흐무트 점령을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을 점령한 것에 비유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바흐무트를 점령한다고 전쟁의 향방이 눈에 띄게 바뀌는 건 아니란 점이다.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의 '완전 해방'이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 목표에 비춰볼 때 도네츠크주 소도시인 바흐무트의 점령이 갖는 의미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교통의 요지로 돈바스 점령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전략적 가치도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함락에 대비해 주변에 겹겹의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빛이 바랜 실정이다.
NYT는 "폐허가 된 이 도시를 손에 넣는다고 돈바스 전역을 정복한다는 러시아 정부의 더 큰 목표에 반드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내외적으로 점령 사실을 선전한 만큼 이후 바흐무트에서의 상황이 악화해도 쉽게 병력을 뺄 수 없게 됐다는 점도 러시아군 입장에선 난감한 대목이다.
이미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 주변 고지대를 점령한 뒤 도시를 점령한 러시아군에 포격을 퍼부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달 초 바흐무트 남쪽과 북쪽 일부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밀어내는 등 3면에서 도시를 압박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한나 말랴르 우크라이나 국방차관은 21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외곽 고지대를 최근 재탈환했다면서 "적들이 바흐무트에 계속 머무는 것이 정말로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은 바흐무트에 러시아군의 발이 묶인 사이 다른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이른바 '대반격' 작전이 개시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우크라이나 지휘관들은 바흐무트 전선에서 자신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러시아군을 붙들고 소모전을 하게 만들어 손실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군이 서방제 무기로 무장하고 반격에 나설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고 말해왔다.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 입장에선 우크라이나군의 대규모 반격에 대응할 능력이 약화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바흐무트 방어를 위해 증원군을 계속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진단했다.
실제, 영국 군정보기관인 국방정보국(DI)이 20일 트위터로 공유한 일일 보고서는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측면에서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자 러시아군이 바흐무트 전선에 대대급 부대 여럿을 재배치했다고 전했다.
지난 20일 바흐무트 점령을 선언한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은 25일 러시아 정규군에 이곳을 넘기고 철수할 뜻을 밝혔는데, 이것이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고 NYT는 지적했다.
다만,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바그너그룹이 바흐무트 전투에서 전력을 완전히 소진해 다른 전투에 투입되기 어려울 정도로 무력해진 상태라면서, 러시아군은 다른 전선을 희생해 이들의 철수로 발생한 공백을 메워야 할 형편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10개월여간 이어진 전투로 폐허가 된 바흐무트 현지 상황을 전하는 러시아 언론들은 도시가 파괴된 책임을 우크라이나군에 돌렸다. 한 러시아 특파원은 "그들은 도시를 더는 지킬 수 없게 되자 완전히 파괴하려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바흐무트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으나 러시아군 지휘부와 공개적으로 대립각을 세워 온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이름을 언급한 매체도 거의 없었다.
NYT는 "이는 러시아 선전도구들이 자국민들에게 엘리트층의 내분과 전선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얼마나 숨기고 싶어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꼬집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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