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붕괴로 내몰리는 10여개 빈국…배경엔 중국 '부채의 덫'(종합)
AP통신 "中, 부채 경감·탕감 주저, 대출조건 등 비밀 강요"
"IMF 등 다른 곳 지원도 중국 때문에 사실상 막혀"
(서울=연합뉴스) 김기성 인교준 기자 = 지난해 경제난에 시달리던 스리랑카에서는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 시위대가 대통령궁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격렬한 시위로 국가 재정에 짐이 되는 계약을 중국과 한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타국으로 도피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물가상승률은 50%대로 치솟으면서 인구 다수가 빈곤의 나락에 빠졌다.
이처럼 막대한 외채 때문에 극심한 경제적 불안이나 심지어 붕괴에 직면한 10여개 최빈국들이 중국에 진 빚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AP통신이 18일(현지시간) 진단했다.
AP는 잠비아·우간다·케냐·가나·콩고민주공화국·에티오피아, 몽골·라오스·파키스탄·스리랑카, 에콰도르·온두라스 등 12개국이 중국에 진 채무 상황을 분석한 뒤 이같이 전했다.
조사 대상국 대부분은 외채의 50% 이상이 중국 채무였으며, 정부 세수의 3분의 1 이상을 부채 상환에 쓰는 것으로 파악됐다.
케냐에선 중국에 진 채무를 갚기 위해 공무원 수천 명의 급여 지급을 장기간 미뤄야 했고, 파키스탄에선 외채 부담이 전력 생산 부족과 공장 가동 중단으로 이어져 섬유 노동자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런 가운데 잠비아와 스리랑카는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져 항만·광산·발전소 건설 대출금 이자도 갚지 못하는 형편이다.
스리랑카는 자국의 함반토타항 운영권을 중국 국영 대기업 차이나머천트그룹(招商局集團·CMG)에 넘긴 상태다. 중국 자본으로 항만 건설에 나섰으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해 99년 기한으로 항만 운영권을 넘긴 것이다.
이들 나라는 조세 수입이 부족해 학교 유지와 전기 공급, 식품과 연료비 지불 등 기본적인 국가 운영을 외채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서 외채 이자를 겨우 갚으며 붕괴를 모면하는 경제 구조 탓에 외화보유액이 줄줄 빠져나가는 실정이다.
AP는 조사 대상 12개국 중 10개국에서 외화 보유액이 최근 1년 만에 25% 감소했으며, 파키스탄과 콩고민주공화국에선 이 기간 50% 줄었다고 분석했다.
애초 중국은 최빈국들에 자원 개발을 통해 서로 경제 발전을 꾀하자는 명분으로 접근, 주로 광산과 철도·도로 건설 프로젝트에 자국 자금을 투입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을 통해 세계의 주요 자원을 독식하는 한편 경제·외교·안보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중국의 의도가 담긴 사업이었다.
하지만 투자 대상국으로선 효율적인 투자가 아니었다. 합당한 수익 창출은 불가능했고, 부채의 덫은 예상된 수순이었다고 AP는 설명했다.
AP는 이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배경에는 중국이 있다고 짚었다.
중국은 부채 탕감을 주저하면서 대출 규모나 조건 등에 대해 엄격한 비밀 유지를 요구해 다른 주요 나라들이 지원에 나서는 것조차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 국제 대출기관의 접근을 사실상 차단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채무국들에 비밀 에스크로(결제 대금 예치) 계정에 현금을 두도록 의무화해 자국 기업들이 1순위 채권자가 되도록 하는 편법도 쓰고 있다.
외견상 국가 중앙은행 간 스와프 거래를 가장한 중국과 가난한 나라들과의 외환 거래도 큰 문제다.
달러 등 외환 준비금을 보충해 디폴트를 막기 위한 단기적 스와프 거래를 가장해 중국이 빈국에 높은 금리를 적용해 장기간 거액 대출을 제공한 것이다. 이는 국가 부채로도 잡히지 않아 위험이 생겨도 외부에선 그 위험성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스와프 거래로 몽골은 연평균 18억 달러(약 2조4천억원)를 빌렸고, 이는 몽골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달했다. 파키스탄은 연평균 36억 달러(약 4조8천억원), 라오스는 3억 달러(약 4천억원)를 각각 대출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국제사회의 부채 경감·탕감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AP는 전했다.
실제 최대 170억 달러(약 20조9천억원)에 달했던 대외부채의 3분의 1 이상을 중국 측에 빚진 잠비아는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후 아프리카 국가 중 처음으로 디폴트에 빠졌으나, 중국은 '나 몰라라' 수준이다.
잠비아의 경우 2020년 달러 고갈로 인해 대출 이자 지급 중단을 몇 개월만 허용해달라는 요청을 중국이 거부했고, 결국 같은 해 11월 디폴트를 선언하게 됐다.
AP는 디폴트 선언 이후 잠비아가 중국 국영은행에 66억 달러(약 8조8천억원)의 부채를 진 것으로 파악됐으며, 이는 시장 예상치의 2배에 달했지만 외부에선 이를 감지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 부채가 많은 온두라스는 재정적 압박 속에서 지난 3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중국의 이런 완강한 자세는 과거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의 정부 대출 기관이 빈국의 부채 경감·탕감에 나섰던 것과는 대조된다.
미국·프랑스·독일·한국·일본 등 22개국이 속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은 스리랑카 등에 채무를 경감해주자는 입장이었으나, 중국은 이에 반대했다.
대신, 중국은 대출 기간을 연장하거나 기존 채무를 신규 차관으로 변제하는 차환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특정국 대상으로 부채 경감·탕감 조치를 하게 되면 다른 채무국들도 너도나도 유사한 조치를 원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를 두고 미국과 유럽 등이 중국이 '부채 함정 외교(debt-trap diplomacy)'를 하고 있다고 공격하지만, 중국은 세계은행 등 다자개발은행 책임이 더 크다며 맞선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IMF 등이 먼저 개발도상국 채무를 줄여 채무 조정에 따른 손실을 부담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기색이 비친다.
중국이 지난달 12일 IMF, 세계은행, 주요 20개국(G20)이 참가한 원탁회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해 개도국 지원 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미국과 서방이 21일 폐막하는 주요 7개국(G7) 히로시마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해 일치된 대응을 할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중국이 아군 확보 차원에서 최빈국 부채 문제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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