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주택 LH가 우선매수…피해자에 시세 30∼50%에 임대
"공공매입 없다"던 정부, 우선매수권 실효성 논란에 방향 선회
전세사기 피해 전국 확산 조짐도 영향…임차인 거주권 보호 긍정적
LH 매입 전세사기 대상 주택범위 모호…다른 피해자와 형평성 논란도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정부가 21일 전세사기 피해자의 경매 주택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매입임대제도를 활용해 대신 매입해주겠다고 밝혔다.
전날까지 "공공매입은 불가하다"는 정부 입장에서 일부 선회해 정부가 일단 피해자 주택을 경매에서 우선매수권 형태로 인수하고, 공공임대로 활용하는 방안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임차인의 거주권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많지만, 임차인의 피해 보증금을 온전히 보전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전세사기 대상 주택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모호하고, 일각에서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다른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도 나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 야권 '공공 직접 매입' 요구…LH 매입임대 방식으로 우회
정부는 전날까지도 전세사기 피해주택의 공공매입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전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야당의 공공매입 요구에 "무슨 돈을 갖고 어느 금액에 사라는 말이냐"라고 반박했고,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원장도 "공공이 손해를 감수하며 매입하더라도 선순위 채권자에게만 이익이 돌아가 근본적인 피해자 구제 방안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전세사기 피해가 인천 미추홀구에 그치지 않고 경기 화성·구리와 대전, 부산 등 전국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보다 적극적인 구제 대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피해 임차인의 요구대로 경매를 일시 중단하고 경매 주택에 대해 우선매수권을 주기로 했지만, 피해 임차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저리대출을 해줘도 임차인이 주택을 매입할 능력이 없는 경우 실효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반응도 공공매입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다.
부동산 업계에선 경매 우선매수권이 낙찰자가 써낸 최고가(낙찰가)가 우선매수 금액이 되는 것이어서 해당 주택이 비싸게 낙찰된 경우에는 피해자의 주거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번 조치를 '공공매입'이라 하더라도 주로 야당에서 거론되는 것과는 다르다.
야당 의원들이 발의한 특별법은 '공공매입을 통해 피해자의 보증금의 대신 반환한다'는 것이지만, 정부가 이날 제시한 방침은 LH의 매입임대 방식을 활용하는 것으로 보증금과는 관계없다.
이 경우 추가 재정 투입 없이 전세사기 주택 매입이 가능하고, 매입 주택을 공공임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임차인이 원하면 모두 우선매수권으로 매입…시세의 최저 30%로 임대
정부가 구상 중인 지원방안은 LH의 매입임대 제도를 활용해 피해 임차인이 원할 경우 LH가 해당 주택을 대신 사주겠다는 것이다.
임차인에게 주어진 우선매수권을 LH가 대신 행사하는 격이다.
정부는 LH 매입임대 물량 2만5천호와 지방공사 및 지방공사 물량 9천호를 활용해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최대 3만5천까지 사들인다는 방침이다.
매입임대주택 호당 매입가격은 2억원 선으로, 최대 7조원의 자금을 투입되는 셈이다.
LH는 올해 매입임대 사업 예산으로 5조5천억원을 확보한 상태여서 사업 추진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세사기 대상 주택을 모두 매입하는 것은 아니다. 임차인이 원하는 경우에 한해 LH가 매입하는 구조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대책위에 가입된 미추홀구 34개 단지 1천787가구 가운데 경매가 진행 중이거나 대기 중인 주택은 총 933건에 달한다.
여기에 추가로 전세사기 의혹이 불거진 경기·대전·부산까지 합하면 피해 주택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추가 당정협의를 거쳐 피해 임차인과 LH 등 공공기관에 피해 주택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기 위한 법안 개정에 나설 방침이다.
정부는 매입임대 방식으로 피해 주택을 매입하면 임차인을 강제 퇴거시키지 않고 싼값에 재임대를 제공해줘 주거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LH는 현재 매입임대주택을 청년과 신혼부부 등에게 다가구는 시세의 30∼40%,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70∼80%에 공급하고 있는데,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에게는 시세보다 보다 싼 값에 임대를 줄 계획이다.
국토부 권혁진 주택토지실장은 "공공임대 매입임대는 2년 단위로 갱신해 최대 20년까지 거주 가능하며 임대료는 시세의 30∼50% 수준"이라며 "이 정도 선이면 일반 시중 전월세보다 세입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라고 말했다.
매입임대 사업은 이미 시행 중인 제도로, 추가 법 개정이 필요 없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세부 임대기간과 임대료는 23일 당정협의 등 추가 논의를 거쳐 확정될 전망이다.
원희룡 장관은 이날 LH와 진행한 회의에서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충분한 거주기간을 보장할 방침"이라며 "피해자 개인이 처한 상황과 희망 사항을 고려해 입법 과정에서 균형있게 설계하겠다"고 말했다.
◇ 피해보증금 보전엔 한계…전세사기 주택대상 모호·형평성 논란 우려도
전문가들은 피해 주택 인수에 매입임대 제도를 활용할 경우 추가 재정 투입없이 임차인의 거주권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직방 함영진 빅데이터랩장은 "피해 임차인은 해당 주택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이 문제가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 경우도 피해 임차인의 보증금을 보전해주지는 못해 임차인의 보증금 손실은 불가피하다.
다만 LH가 주택을 우선매수해 줄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연이어 터지고 있는 '빌라왕' 또는 '건축왕' 사건의 경우 일명 '바지사장'(가짜 임대인) 등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전세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집값과 전셋값이 단기 급등 또는 급락하면서 갭투자 실패로 '나쁜 임대인'이 된 경우도 전세사기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지옥션 이주현 선임연구원은 "과거에도 집주인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거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경우는 많았다"며 "최근 전셋값 하락에 따른 역전세난 심화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경매로 넘겨지는 경우에도 전세사기로 볼 것인지 불명확해 보인다"고 말했다.
우선매수 적정 가격도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임차인은 일단 해당 주택이 최대한 유찰을 거듭해 시세의 절반 이하의 싼값에 낙찰돼 이 금액으로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이 경우 시중 금융기관이나 자산관리공사 등 부실채권 매입 공공기관과 같은 선순위 근저당권자는 채권 회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익명을 원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정부가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는 주택인 게 알려지면 입찰을 꺼리게 되고 유찰이 거듭되면 매각이 지연되거나 저가 낙찰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1·2금융권은 그나마 정부 입김이 작용할 수 있지만 선순위 근저당권자의 또다른 축인 추심·대부업체에도 손실을 감수하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피해 주택이 고가에 낙찰됐을 때는 재정 손실이 불가피하다. 경매가 장기화돼 집값이 다시 상승하면 낙찰가도 오를 수 있어서다.
LH는 최근 서울 미분양 주택인 강북구 미아동 '칸타빌 수유팰리스'를 사들이면서 고가 매입 논란을 일으키며 최근 '원가 이하 매입' 방안을 대책으로 내놓기도 했다.
역전세난 심화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세입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원희룡 장관은 이에 대해 "단순 전세금 미반환인지, 전세사기 피해물건인지 대상을 특정하는 기준과 절차를 결정해야 한다"며 "충분한 논의를 거쳐 입법 과정에서 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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