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은사에게 집 사준 푸틴…알고 보니 러 재벌 돈이었다
WP·ICIJ, 2005년 아브라모비치 실소유 회사 기증서 확보
"푸틴시대 불문율"…아브라모비치 "유대인단체 요청 응한 것"
(서울=연합뉴스) 최재서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과거 자신의 은사에게 아파트를 쾌척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가 돈을 댄 것으로 드러났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이 2005년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때 독일어 선생을 만나 20만8천달러(약 2억7천만원)짜리 집 한 채를 선물로 사준 스토리는 그의 몇 안 되는 미담 가운데 하나다.
이 일이 있고 약 10년 뒤 은사 미나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는 이스라엘 현지 신문에 "아파트를 가지게 됐을 때 눈물을 흘렸다"며 "푸틴은 고마움을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말했다.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는 당시 푸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 영사관을 통해 만남을 요청했고, 만남 직후 푸틴 대통령이 주소를 메모하도록 했다고 회상했다.
얼마 안 가 누군가 방문해 푸틴 대통령이 새집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밝히더니 후보 2곳을 보여줬고, 이후 텔아비브의 주택으로 이사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전광석화처럼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WP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회계 기록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실제 주택 매매에 돈을 댄 건 푸틴 대통령이 아닌 그와 연계된 러시아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한 기증서에 아브라모비치가 실소유한 키프로스 페이퍼컴퍼니가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에게 24만5천달러를 송금한 명세가 담겨있던 것이다.
기증서에 기록된 송금 날짜는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가 푸틴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매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2005년은 러시아 정부가 아브라모비치 등이 10여년 전에 2억달러에 사들인 석유회사를 130억달러에 취득한 해이기도 하다.
WP는 송금 자체는 18년 전에 이뤄졌고 아브라모비치의 자산 규모에 비하면 금액도 미미해 큰 의미는 없지만, 온전히 푸틴 개인을 위해 돈을 댔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후원 시스템'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아브라모비치는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혼란기에 엄청난 돈을 쓸어 담은 러시아 올리가르히 가운데 한명으로, 미 포브스는 그의 자산을 87억 달러(약 11조4천억원)로 추산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잉글랜드 프로축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첼시 구단주를 지낸 경력으로 낯이 익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아브라모비치의 자산을 동결했고, 영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지난해 5월 첼시를 매각하기도 했다.
카네기국제평화기금의 러시아 전문가 앤드루 와이스는 이 사안이 "푸틴 시대 핵심 시스템의 불문율과 은밀한 눈짓, 몸짓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짚었다.
그간 아브라모비치는 "푸틴과 어떠한 형태의 경제적 관계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첼시를 사들였다는 내용이 담긴 책 '푸틴의 사람들'(Putin's People)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크렘린궁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아브라모비치가 실제 송금에 관여했는지에 대해선 함구하면서도 "이스라엘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자선활동은 '러시아유대인공동체연맹'(FJCR)이 관리한다"고 주장했다.
아브라모비치 측은 기증 사실 자체는 인정하나 푸틴 대통령이 아닌 FJCR 측의 요청을 받고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FJCR 대표 라빈 알렉산드르 보로다 역시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차에 따라 주요 후원자에게 연락을 취했을 뿐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2017년 그녀가 사망한 이후 주택은 FJCR이 아닌 러시아연방에 귀속됐다.
그 이유에 관해 묻자 보로다는 "나이 든 여성인 유디츠카야-베를리네르는 여러 차례 유언장을 변경했다"고 답했다.
acui7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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