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사고' 아닌 '범죄·살인'…그리스 열차충돌에 분노 활활

입력 2023-03-04 09:47
수정 2023-03-04 15:40
'비극·사고' 아닌 '범죄·살인'…그리스 열차충돌에 분노 활활

"정부, 안전에 손놔" 곳곳서 격렬한 시위…철도노동자는 파업

희생자 신원파악 난항 속 수색작업 종료…정치권은 '네 탓' 공방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그리스가 최소 57명의 사망자를 낸 열차 정면 충돌 사고로 들끓고 있다.

사고 사흘째인 3일(현지시간) 그리스 곳곳에서는 정부와 철도회사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진행됐다.

일부 도시에서는 시위가 격화하며 시위대와 경찰이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사고가 '비극적인 인간적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며 교통부장관 사임과 역장 구속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수십년간 관리를 소홀히 하고 철도민영화 후에도 안전 미비를 방치해 온 것은 '범죄'라는 여론이 거세지며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조짐이다.

◇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철도파업

AFP통신에 따르면 2017년부터 철도망 운영을 맡은 민영기업 헬레닉 트레인의 아테네 본사 앞에는 이날 시위대 수천 명이 모여 수십년간 안전시설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부를 규탄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건물 유리 외벽에 붉은색으로 "살인자들!"이라고 쓰고, 똑같은 문구를 외쳤다.

한 플래카드에는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다"고 적혀 있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한 대학생(21)은 로이터통신에 "어떻게 온갖 기술이 발전한 2023년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그리스 의회 의사당 밖에서는 수백명의 시민이 모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분 묵념을 했다.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촛불집회가 열린 아테네 도심에서는 의사당과 인접한 신타그마 광장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졌으며 경찰은 최루탄과 섬광 수류탄을 발사했다. 이 시위에는 약 3천명이 참가했다.

그리스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키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테살로니키에 거주하는 대학생 소피아(23)는 AFP 기자에게 "일어난 일은 사고가 아니라 범죄"라며 "이 모든 것을 보고도 계속 무관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 철도노동자들은 철도안전을 간과해 온 정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일손을 놨다. 이들은 전날 전국 사업장에서 파업을 개시한 데 이어 이날도 일터에 복귀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48시간 동안 추가로 파업을 지속할 예정이다.



◇ 시신 신원파악 어려움 속 첫 희생자 장례식

사고 후 사흘간 수습 과정에서 발견된 시신은 57구이며, 이 중 5명은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탈선한 객차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시신이 심하게 훼손돼 육안으로 신원 파악이 가능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신원이 밝혀진 52구는 거의 모두 DNA 조사를 거쳤다고 로이터통신은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전했다.

훼손이 심한 시신을 유족이 볼 경우 정신적 충격이 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그리스 보건부는 시신을 넣은 관을 밀봉한 상태로 유족에게 전달토록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소방당국 관계자들을 인용해 시신 수색 작업이 3일을 끝으로 종료될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그리스 북부의 도시 카테리니에서는 이번 사고로 숨진 34세 여성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는 이번 참사 희생자 57명 중 첫 장례였다. 고인의 남편은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AP통신은 설명했다.





◇ 정치권은 책임 공방

이번 사고로 국가 추모 기간이 선포된 가운데, 정치인들은 서로 상대 정당을 비난하면서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고 독일 dpa 통신은 전했다.

그리스에서는 최근 10년 간 양대 정당인 중도우파 '신민주당'과 좌파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번갈아 집권했다.

신민주당 지도자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사고 다음 날인 이달 1일 현장을 방문한 후 대국민 TV연설에서 "모든 상황으로 보아, 이번 드라마는 슬프게도 '비극적인 인간적 실수'가 주된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고를 '(그리스에서) 전례가 없는 끔찍한 기차사고'라고 부르면서 철저한 조사를 다짐했다.

그러나 철도노조 등은 정부가 철도시설 유지와 시설 개선작업을 소홀히 해 왔으며, 5년 전 철도 민영화 후에도 관리감독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초 미초타키스 총리와 집권 신민주당은 다음 달 초 총선을 실시하는 일정을 구상해 발표 시기를 저울질해왔으나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이를 미룬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고는 지난달 28일 밤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정면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아테네를 출발해 테살로니키 방향으로 달리던 여객열차에는 승객 342명과 승무원 10명이 타고 있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주말과 휴일이 이어진 황금연휴를 즐기고 돌아가던 20대 대학생이었다.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교통부 장관은 사고 발생 다음날인 1일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여객열차 선로 변경 지시에서 실수를 저질러 사고의 직접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 라리사 역의 역장(59)은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limhwas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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