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중환자 '병원 찾아 삼만리'…제주서 헬기 태워 서울로

입력 2023-02-12 08:13
소아중환자 '병원 찾아 삼만리'…제주서 헬기 태워 서울로

소아중환자실 전문의 1인당 환자 '일본 1.7명 vs 한국 7.5명'

응급환자 심각·소아암 치료도 위기…의료계 "수가체계 대폭 개선이 최선"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소아청소년과 의사 부족에서 비롯된 진료 공백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최근 필수 의료 지원대책을 내놨지만, 의료계에서는 현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소아청소년 의료 체계 붕괴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정부·학계·의료계·정치권 등이 조속히 머리를 맞대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생명이 걸린 소아청소년과 응급 의료 체계의 복구·유지·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면 구급차가 골든타임 안에 어린이 응급 환자를 병원으로 싣고 온다 해도 이를 진료할 소아청소년 전문의가 없어 꺼져가는 어린 숨결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하는 비극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 소아진료 붕괴 위기 여전…중증은 위험수위·경증환자는 '오픈런'

12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제주도에서 생후 3개월 된 아이에게 심정지 상황이 발생했다. 아이의 부모는 119 구조대에 연락해 응급실에 갔지만 제주도 내 병원을 통틀어 고작 3개뿐인 소아중환자실은 수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수소문 끝에 부모는 서울의 삼성서울병원 소아중환자실에 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방헬기에 아이를 태웠다.

하지만, 삼성서울병원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아이는 골든타임을 넘긴 상태였다. 의료진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지만,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

의료진은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 소아 진료시스템의 허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제주도 내 소아중환자실에서 신속히 치료해도 회복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소아중환자실을 찾아 서울까지 와야 하는 고난의 과정은 아이한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중범 삼성서울병원 소아 중환자실 교수는 "1살 미만 영아의 경우 소방헬기의 진동이 심하기 때문에 기도삽관이 빠지기 쉽고, 헬기 내에서 청진도 제대로 하기 어렵다"면서 "더욱이 장시간을 인공호흡기도 없이 손으로 인공호흡기 역할을 하면서 아이를 이송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소아중환자실에서 최선을 다 해도 기대만큼의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소아 진료의 문제는 비단 중증 환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요즘은 동네 병원에서 감기 진료조차도 쉽게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3살 된 아이를 둔 A씨(36.여)는 올해만 벌써 세 차례나 소아과 '오픈런'을 했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열이 오르고 기침이 심해져 밤새 전전긍긍하다 병원이 문을 열자마자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둘러 병원을 가도 진료까지 1시간여를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A씨처럼 오픈런하는 부모들이 많아 이미 병원이 환자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전국 주요 국립대병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립대병원 15곳의 소아청소년과 평균 진료 대기일 수는 2017년 9.7일에서 지난해 16.5일로 5년 새 약 70% 늘어났다.

다만 경증의 경우 과거와 비교해 아동청소년 인구가 많이 줄었는데도 소아청소년과가 더 붐비는 것은 환자당 의료기관 방문횟수가 과거보다 더 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예전에 한 가정의 아이 셋이 모두 합쳐 1년에 여섯 번쯤 진료받으러 왔다면, 지금은 아이 한 명이 스무 번 온다"고 했다.



◇ 소아진료 기피하는 의사들…전국 5개 수련병원만 겨우 전공의 채워

소아진료 붕괴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 소아청소년을 진료하는 현장에 있어야 할 의사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생명이 위중한 아이들을 돌보는 소아중환자실은 더 위태롭다.

이런 현실은 미국과 일본 등의 다른 선진국과 달리 소아중환자 사망률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소아중환자의학회가 최근 집계한 자료를 보면, 국내 생후 1개월 이상∼18세 이하 소아청소년 중환자의 사망률은 58%로, 생후 1개월 미만 신생아 중환자의 사망률(42%)보다 16%포인트나 높았다. 이는 신생아 중환자의 대부분이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치료받는 것과 달리 소아청소년 중환자는 대부분이 성인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게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실제로 별도의 소아중환자실이 없는 병원에서 치료받은 소아중환자의 사망률은 5.2%로 소아중환자실이 있는 병원의 사망률(3.7%)보다 40% 이상 높았다.

문제는 국내에 소아중환자실을 갖춘 병원이 13곳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교수와 전임의들이 하루건너 온콜(전화대기) 당직을 해야 할 정도의 열악한 근무 여건에 그나마 남아있는 의료진들의 사기마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 소아중환자실 1.7병상당 전담 전문의 1명꼴로 근무하고 있지만, 우리는 7.5개 병상을 전문의 1명이 도맡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를 3교대 근무로 환산하면 22.5명의 소아중환자를 1명이 진료하는 셈이다.

조중범 교수는 "중증도가 높은 소아 환자에게 집중해 생존율을 높이려면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진이 24시간 상주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침상당 의사 비율이 1대 2 정도가 돼야 하지만 국내에 이런 비율을 갖춘 소아중환자실은 없다"면서 "사실상 교수와 전문의는 개인적인 시간 없이 매일 환자에 메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몇 년째 바닥이다. 2023년도 전기 전공의 모집 결과를 보면, 소아청소년과는 208명 정원에 53명이 지원해 최종 지원율 25.5%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지원자 33명에서 20명이 추가로 지원했지만, 지난해 수준(28.1%)에도 미치지 못했다.

수련 병원 가운데서도 지원율 차이가 극심하다. 전체 소아청소년과 수련병원 64곳 가운데 전공의를 1명 이상 확보한 병원은 17곳뿐이다. 이중 서울대병원, 강북삼성병원, 서울아산병원, 분당제생병원, 삼성서울병원 5곳만 정원을 채웠다.

한 전공의는 "기본적으로 소아청소년과 자체의 인기가 떨어진 측면도 있지만, 동료 전공의가 없는 병원에 가면 이른바 '독박'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 저출산 시대 소아진료는 '필수 중 필수'…"정부 의지 보여야"

의료계는 저출산 시대에 소아 진료는 필수 중 필수인 만큼 정부가 붕괴 위기를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만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개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교수는 "소아청소년과 위기는 오랫동안 의사들의 사기 저하를 부른 저수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다"고 했다.

소아암은 국내에서 신규로 발생하는 환자의 절반 이상이 서울의 주요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들 병원도 전공의가 급감하고, 이를 대체할 전문의 채용이 안 돼 갈수록 진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 교수는 "소아암 치료 성적은 현재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있지만, 지금처럼 전공의 부족이 가속화된다면 소아암 환자들도 점점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면서 "소아암 환자에게 합병증이 일어나고,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아이들을 살리려면 적정 인력과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하는 만큼 정부가 향후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정부에 연령 가산 수가를 2배로 올리고, 흉부외과처럼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에 대해 정부가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전공의를 대체할 전담 전문의 고용지원책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앞서 정부는 어린이공공전문진료센터 운영으로 발생한 손실은 기관 단위로 사후 보상하고 고난도·고위험 수술에 대해서도 추가 지원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소아 일반병동 입원에 대한 연령가산과 소아중환자실 입원료 개선도 추진하기로 했다.

나영호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회장은 "소아 진료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에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내놨지만 아직은 제대로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면서 "이제는 정부가 의료계 현장의 목소리에 좀 더 목소리를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 보상사업도 80% 정도의 보상으로는 기존 구조를 벗어난 인력 개편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박양동 아동병원협회 회장은 "소아 진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려면 중증 응급환자 치료와 일반 건강보험 급여 치료만으로도 의료기관의 흑자 경영이 가능하도록 수가 체계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성관 우리아이들병원 이사장은 "아이를 한 명 진료하는 데에는 성인과 달리 2∼3배의 인력이 들어가지만, 실제 그에 대한 보상은 성인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아이 1명당 투입되는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 환자 수가 많다고 소아청소년과가 잘되는 게 아닌 만큼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책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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