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이었다"는 젤렌스키 프랑스 방문…영국과 경쟁 의식했나
런던서 찰스 3세·총리 회동에 의회 연설…파리서는 늦은 만찬만
마크롱, 젤렌스키에 프랑스 대통령이 받는 최고 등급 훈장 수훈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예고 없이 영국을 깜짝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오전부터 런던에서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하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 무렵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기다리고 있는 엘리제궁으로 이동해 오후 10시 30분 카메라 앞에서 차례로 소감을 밝힌 뒤에야 만찬을 시작할 수 있었고, 식사는 0시 30분께 끝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만찬을 마무리하고 나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중에서도 등급이 가장 높은 '그랑 크루아'를 수여했다. 5개 등급 중 1등급에 해당하는 그랑 크루아 훈장은 프랑스 대통령이 받는 훈장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에게 너무 과분하다"며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고,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 국민들, 그리고 볼로디미르 대통령의 용기와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마크롱 대통령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유럽연합(EU) 특별 정상회의가 열리는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기 전까지 젤렌스키 대통령이 파리에 체류한 시간은 11시간 남짓. 만찬과 훈장 수여를 제외한 다른 공개 일정은 없었다.
런던에서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을 하고,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영국 국왕을 접견했으며, 외국 정상으로서 드물게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연설하는 등 빽빽한 일정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일정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국 방문과 달리 프랑스 방문은 사전에 촘촘하게 계획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 숄츠 총리와 개최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번 만남이 "즉흥적이었다"고 표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 숄츠 총리와 나란히 서서 "우리가 만나서 대화할 수 있도록 한 즉흥적인 아이디어에 감사하다"며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전쟁에서)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AFP 통신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애초 8일 런던 방문을 마치고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벨기에 브뤼셀로 향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엘리제궁에서 만찬 일정이 막판에 추가됐다고 해당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다음날이면 EU 정상회의에서 대면할 젤렌스키 대통령을 파리로 초청해 따로 만찬을 주최하고, 훈장까지 수여한 것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EU를 떠난 영국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가 읽힌다.
지난해 2월 24일 발발한 전쟁을 전후로 러시아를 강경하게 몰아세운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와 달리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며 중재를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쟁 초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외교적 채널을 열어둬야 한다며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러시아에 굴욕감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등의 발언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우크라이나에 프랑스산 경전차 지원을 제안하면서 다른 서방 국가들이 망설이던 주력 전차 지원에 물꼬를 텄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갈망하는 전투기 지원도 원칙적으로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런던, 파리, 브뤼셀 등 유럽 순방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과거 불편한 발언을 했던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에는 진짜 변했다"고 평가했다.
전직 외교관 출신인 미셸 뒤클로 몽테뉴 연구소 특별고문은 AFP에 전쟁 후 처음으로 유럽 순방에 나선 젤렌스키 대통령이 만약 파리에 오지 않았다면, 마크롱 대통령의 위상이 떨어져 외교 정책에 실패했다는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뒤클로 특별고문은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 간에, 그리고 유럽 내부에서도 무기 지원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를 찾기 위한 일종의 경쟁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run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