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민 60년] ④ <인터뷰> 브라질 이민史 필독서 남긴 '산증인' 백옥빈 할머니

입력 2023-02-10 08:00
수정 2023-02-10 23:38
[집단이민 60년] ④ <인터뷰> 브라질 이민史 필독서 남긴 '산증인' 백옥빈 할머니

의사 남편·자녀 4명과 1963년 도착…영농이민 실패 후 상파울루 정착

"정착 초기 자녀들까지 공장 취업…힘들어서 우는 모습 보고 마음 아파"

"가족·신앙의 힘으로 착근"…이민·정착과정 담은 '백옥빈 일기' 집필



(캄피나스[브라질]=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김지윤 통신원 = 국내 최고의 사범대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년의 여성은 60년 전 의사 남편과 함께 자녀 넷을 데리고 브라질 산투스 항에 내렸다.

이역만리 먼 나라에서 새로운 도전의 삶에 나선 뒤 고통과 고난 속에 '왜 왔나' 싶어 눈물을 쏟는 날도 있었다.

친절하고 온순한 이웃들과 정을 나누면서는 '잘 왔다' 싶어 미소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60년이 지난 이제 그는 "꿈과 신앙, 가족 간의 사랑" 덕분에 "천당 속에서 살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한국 정부 공식이민 1세대이자 브라질 이민사 연구자들의 필독서인 '백옥빈 일기' 저자 백옥빈(100) 할머니 이야기다.

지난 3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차로 1시간 40분 정도 떨어진 캄피나스 자택에서 만난 백 할머니는 큰 딸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고영자(79) 씨와 함께 자리해, 장시간 또렷한 기억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192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 할머니는 경성사범학교(서울대 사범대 전신)를 나온 뒤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42년에 남편(고계순·1997년 별세)과 결혼한 뒤 서울로 거처를 옮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녀 3남을 둔 그는 의사인 남편과 함께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던 중 사촌(고광순)의 권유를 받은 남편의 결심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외국 가려면 이혼하고 가라고 할 정도로 처음엔 (이민에) 반대했지만, 당시 힘든 사회에서 떠나 새로운 세상에 가보고 싶기도 했다"는 백 할머니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반, 지상낙원이라는 브라질에 잘 왔다는 마음 반"이었다고 했다.

영농 이민이라는 취지에 맞게 백 할머니 가족은 일본 이주민 농장을 답사하는 등 정착을 시도했지만, 순조롭지 않은 농장 계약 문제와 낯선 분위기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농가로 향한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백 할머니 가족은 상파울루에 나와 재정착하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초반엔) 자녀들까지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는 백 할머니는 "아이들이 (힘들어) 우는 모습을 보는 게 특히 마음 아팠다"고 옛일을 떠올렸다.



사정이 다소 나아진 건 백 할머니의 남편이 병원을 개업하면서다.

고졸 자격시험과 의대 유학을 거쳐 50세의 나이에 현지 의사 자격을 취득한 남편은 한인 출신 1호 브라질 의사다.

자신의 19번째 생일날 브라질에 도착했다는 딸 고영자 씨는 "아버지는 한국에 있을 때도 수술 실력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며 "(브라질) 이민선에서는 인솔 단장을 맡았고, 브라질에서도 교민회장을 하며 솔선수범하는 삶을 사셨다"고 전했다.

이후 백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브라질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여러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 온 학계·문학계 인사를 집으로 초대해 대접하는 한편 여성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며 자원봉사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사이 자녀들도 브라질에 뿌리를 내렸다. 딸 영자 씨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 전시를 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활동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조각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의류업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한 두 아들과 아버지 대를 이어 의사가 된 막내아들도 백 할머니의 자랑거리다.



백 할머니는 특히 한국 첫 공식이민의 생생한 기록인 '백옥빈 일기'라는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이민선에 오르기 이틀 전인 1962년 12월 16일 '새벽 4시 40분 뻐스(버스)로 안성을 출발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기에서 백 할머니는 이민 출발과 도착, 정착 과정과 이민 생활 일상 등을 섬세한 관찰력으로 꼼꼼하게 적었다.

"당시 월간지 기자의 제안을 받고 일기를 썼다"는 그는 특별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에 도착하는 장면, 눈물 어린 환송식 분위기, 뱃멀미와 함께 한 이민선에서의 일상, 생경한 브라질에서의 삶을 날짜, 지명, 인명 등 정확한 정보와 함께 담아냈다.

'흑인 남녀들이 독특한 춤을 추는' 카니발에 대해 "자녀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싶은 감상평을 남기는가 하면 새로 오는 이민자를 위해 꼭 필요한 물품 세부 목록까지 기술하기도 했다.



"본 대로, 들은 대로 기록하려 애썼다"는 백 할머니는 특히 가정과 신앙(천주교)생활에 대해 자세히 적었다.

실제 백 할머니는 이민 생활에서 희망·가정·종교의 힘이 컸다고 한다.

그는 "항상 기뻐하고, 매사에 감사하며, 늘 기도하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며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듯한 성경의 한 부분을 언급하기도 했다.

백 할머니는 "브라질 사람들이 이민자에 대해 이해심이 많고 순한 점도 좋았다"며 "지금은 집에서 성가만 들어도 이곳이 천당 같다"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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