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력 키우는 일본, 평화주의에서 '전쟁 가능' 국가로

입력 2022-12-16 16:59
수정 2022-12-16 18:26
방위력 키우는 일본, 평화주의에서 '전쟁 가능' 국가로

'반격 능력' 안보문서에 명기…5년 뒤 방위비 세계 3위 가능성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 후 채택한 평화주의에서 탈피해 전쟁 수행이 가능한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6일 각의(閣議·국무회의)에서 적 미사일 발사 거점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 보유를 명기하고 방위력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공식 결정했다.

반격 능력의 보유는 장사정 미사일 등 원거리 공격무기의 확보를 전제로 한다. 이는 일본의 평화헌법과 그에 기초한 전수방위(專守防衛·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방위력 행사 가능)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 헌법상 '전력 보유·교전권'은 인정하지 않아

일본 헌법 9조 1항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9조 2항은 "전항(1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해·공군이나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력 보유를 금지하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은 태평양전쟁 직후 미군정 주도로 마련됐다.

전후 미국은 옛 일본군을 해산한 뒤 일본을 비무장 평화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미소 냉전의 심화와 중국의 공산화(1949년) 등으로 인해 미국의 일본 정책은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1950년 6월에 발생한 한국전쟁 때 일본은 미군에 후방 기지를 제공하고 미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일본 소해부대 인원 약 1천200명이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기뢰 제거 작전에 참여했다. 한반도에 파견된 일본인이 항만 및 철도 업무 등에서 미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년 일본은 자국 영토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자위대를 창설했다.

사실상 군사 조직인 자위대의 존재는 전력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 2항과 모순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제기돼 왔다.

◇ 자위대 창설 이후 '경무장 노선' 상당 기간 유지

일본은 자위대 창설 이후에도 상당 기간 평화헌법의 정신에 따라 경무장 노선을 유지해왔다.

상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 비로소 방위력을 행사하고, 그 행사도 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에 그치며, 또 보유하는 방위력도 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으로 한정한다는 전수방위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1955년 7월 열린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스기하라 아라타 당시 방위청 장관이 전수방위라는 용어를 처음 국회에서 사용했다.

당시 스기하라는 "일본으로서는 정말 엄격한 의미로 자위의 최소한도의 방위력을 가지고 싶다"며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침략적인 공군을 가진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므로, 오로지 일본을 지키는 것이 된다. 즉 오로지 전수방위라는 생각"이라고 언급했다.

1970년 방위청이 처음 발간한 방위백서에도 전수방위가 방위 정책의 기본으로 기술됐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1976년 국민총생산(GNP) 대비 1% 이내로 방위예산을 편성한다는 원칙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1970년대까지 일본에선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 전 총리가 주창한 '경무장 경제 중시' 노선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었다.

◇ 1980년대 미소 신냉전 속 일본 안보 역할 커져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미국이 공세적인 해양 전략을 채택하고 태평양 전역에서 소련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면서 미일 동맹에서 일본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미치시타 나루시케 일본 정책연구대학대학원 교수는 "1978∼1990년 시기 미일 동맹의 주목적은 극동과 태평양 전역에서 소련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면 "1980년대 들어 미국의 태평양 전략은 한반도 유사(有事·전쟁 등 긴급상황) 시나리오 일변도에서 대(對) 소련전(戰)을 포함하는 것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미일 연합작전계획이 수립되고 연합훈련도 본격적으로 시행됐다고 미치시타 교수는 전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 시절인 1987년 방위비를 GDP의 1% 이내로 한다는 원칙이 폐지돼 1987~1989년도에 일시적으로 방위 예산은 GDP의 1%를 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붕괴로 미소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일본의 역할은 작아졌지만, 자위대 해외파병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자위대는 1991년 4월 해상자위대 소해정이 페르시아만에 파견돼 기뢰 제거 활동을 벌이는 등 걸프전을 계기로 전후 처음으로 해외로 파견됐다.

이후 육상자위대가 1992년 6월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캄보디아에 파병되는 등 국제 안보 환경 변화에 맞춰 자위대의 해외 활동 영역이 확대돼 왔다.



◇ 자위대 해외파병…한반도 인근에서도 역할 확대

1990년대 들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한반도 인근에서도 자위대의 역할이 점차 확대돼 왔다.

1999년 제정된 일본 '주변사태법'은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미군에 대한 비전투 작전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을 통해 한반도 유사시 미국과 일본의 작전 협력이 가능해졌다.

나아가 2015년 안보 관련법이 일본 국회를 통과하면서 동맹국이나 우호국이 무력 공격을 받아 일본이 '존립 위기 사태'에 이르면 무력을 동반하는 집단자위권 행사도 가능해졌다.

주변사태법에선 비전투 임무만 가능했는데 집단자위권이 인정되면서 전투 임무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자위권 인정이 한반도나 대만해협 등에서 미군을 지원하는 자위대의 역할을 확대하는 법적, 제도적 정비였다면 반격 능력 보유를 명시한 이번 안보 문서 개정은 자위대가 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는 자국이 직접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는 사태가 발생해도 집단자위권으로서 반격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한반도 유사시 미군 함정이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일본이 집단자위권 차원에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집단자위권은 제도적 정비…이번엔 실질적 능력 확보

일본 정부는 반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갖추기 위해 원거리 타격무기 등을 대거 확보하고, 현재 GDP의 1% 안팎인 방위 예산을 5년 뒤 GDP의 2%까지 대폭 늘린다는 계획이다.

5년 새 방위비를 2배로 늘리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방위비 지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전투 지속 능력을 높이기 위해 탄약 및 유도탄을 확보하고 시설을 정비하는 한편, 유사시 신속한 의사결정과 미군과의 일체성 강화를 위해 자위대 상설 통합사령부도 설치하기로 했다.

아울러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 방위 장비 수출 규제 완화를 검토한다는 내용도 이번에 개정된 안보 문서에 담겼다.

실질적으로 전쟁 수행이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한다는 점에서 이번 안보 문서 개정은 일본 안보 정책의 대전환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치시타 교수는 이번 안보 문서 개정 배경에 대해 "기본적으로 대만 해협의 전략적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이라며 "한반도 안보에도 영향이 있다고 보지만, 일본의 의도는 대만 해협의 긴장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대응하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번의 정책적 변경은 상당히 폭넓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단순히 장비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억지력을 갖추고 만약 억지에 실패했을 때 교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과거에 있던 방위력 강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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