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K반도체] ③ '당근과 채찍'으로 국내외 투자 쓸어 담는 미국

입력 2022-12-05 05:01
수정 2022-12-05 07:49
[위기의 K반도체] ③ '당근과 채찍'으로 국내외 투자 쓸어 담는 미국

반도체 경쟁력을 안보문제로 인식…반도체법으로 5년간 69조원 지원

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하며 한국·대만 등 우방국 기업에 투자 종용



(워싱턴=연합뉴스) 김동현 특파원 = '첨단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기술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미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을 국가 안보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공급망 대란을 겪은 뒤 필수품 생산을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은 데 따른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토대로 미국은 반도체의 국내 제조 기반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전략을 자국 산업 경쟁력 강화, 그리고 최대 경쟁자인 중국의 기술 발전 견제라는 두 축으로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를 가장 먼저 개발한 미국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반도체 연구·개발, 설계, 장비 분야의 선두 주자다.

그러나 그동안 생산을 대만과 한국 등 외국 기업에 맡기다 보니 1990년에 전 세계의 40%를 차지했던 생산능력이 2019년엔 11%로 급감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직후 반도체를 전기차 배터리·희토류·의약품과 함께 공급망을 강화할 4대 핵심 품목으로 지정하고 투자 유치 등을 통한 국내 생산 확대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 의회에서 입법을 마치고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8월 9일 서명한 반도체법(CHIPS Act)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반도체 생산 보조금(390억 달러)과 연구개발 지원(132억 달러) 등에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69조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또 기업이 반도체와 장비 생산을 위해 쓴 설비투자비의 25%를 세액 공제로 돌려주도록 법에 명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법안 서명식에서 반도체 생산기반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는 게 경제와 국가 안보를 증진하는 일이라며 "미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세계를 선도해야 하며 이 법이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반도체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설득이 부드럽지만은 않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석 달도 안 된 작년 4월 12일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소집한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반도체 집적회로의 핵심재료인 원형의 판)를 흔들며 투자를 종용했다.

특히 중국과 기술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미국은 기업들이 투자 대상으로 미국과 중국 가운데 사실상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반도체법은 미국 정부 지원을 받은 기업이 10년간 중국에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설비 투자를 하지 못 하게 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기술을 고도화하고, 이를 토대로 중국에 투자해 이득을 얻으면서 중국의 반도체 기술발달은 우회적으로 돕는 길을 막겠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 상무부는 지난 10월 7일 미국기업이 중국의 반도체 생산기업에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수출통제를 발표했다.

미국산 장비가 없으면 첨단 반도체 생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도체 기술 확보를 차단하는 조치다.

그나마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심사해 허가하기로 했으나 과거보다는 중국에 대한 투자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는 한미 정부간 협의를 통해 수출통제를 1년 유예하는 '파격적인 혜택'도 부여했다.

그러나 미국이 1년 뒤에도 삼성과 SK의 중국 공장에 대해 예전처럼 반도체 장비를 수입하도록 허가할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이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완전히 막으려 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미국의 우방이라고 해도 한국 기업이 계속 중국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을 곱게 봐주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 정부는 더 나아가 미국 기업이 해외에서 민감한 기술 분야 투자를 하는 것을 통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등 경쟁국과 "가능한 한 큰 기술 격차"를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 만큼, 앞으로 기업들이 중국에 투자하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질 전망이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워싱턴지부장은 5일 "반도체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은 앞으로도 미국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수출통제 등을 통해 중국과의 연계를 끊어나갈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기업들은 이런 추세를 고려해 전략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 발전을 견제하는 한편으로 자국내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 일본, 대만 등 우방과도 협력하고 있다.

한국과는 지난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반도체 등의 공급망 강화를 위해 '한미 공급망·산업 대화'를 신설했으며, 일본과는 지난 7월 29일 첫 경제정책협의위원회(EPCC)에서 2나노의 최첨단 반도체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처럼 미국의 장려와 압박 속에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에 투자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 10월에 향후 20년간 1천억 달러를 들여 뉴욕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주는 투자 기간에 55억 달러의 세액 공제를 마이크론에 제공하기로 했다.

아빈드 크리슈나 IBM 최고경영자도 지난 10월 바이든 대통령과 방문한 뉴욕주 포킵시 연구센터에서 반도체 제조 및 연구개발을 위해 뉴욕주에 10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인텔은 지난 1월 오하이오주에 200억 달러를 투자해 새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20년에 걸쳐 2천억 달러를 투자해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곳을 신설하는 중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7월 바이든 대통령과 화상 면담에서 반도체 분야 150억 달러 등 미국에 220억 달러를 신규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SK실트론의 미시간주 공장을 찾아 "중국과 같이 해외에서 만들어지는 반도체에 의존하는 대신, (앞으로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은 여기 미국이 될 것"이라면서 "더 이상 (중국에) 인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탈(脫)중국'을 선언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20년 미국의 압박으로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한 TSMC는 오는 6일 바이든 대통령 참석하에 장비반입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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