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집권 가도' 시진핑, 3연임 확정까지 걸어온 길
문혁때 '8년 하방' 시련 겪으며 '태자당 도련님'서 탈피
집권후 권력 집중·강화 착착…'도광양회' 접고 '대국굴기' 추구
(베이징=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23일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재선출됨으로써 총 재임기간 '15년 플러스 알파'의 장기 집권을 결정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덩샤오핑 이후의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절대적 최고 지도자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혁명원로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로, 정통 태자당(혁명 원로의 2, 3세로 구성된 권력파벌) 계열에 속하지만,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1953년 베이징 태생인 시 주석은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 당시 부친이 반당분자로 몰리면서 유배를 당하자 14살 때 하방해 산시성 옌안에서 8년간 지내며 '도련님' 생활에서 벗어나 기층 민중의 생활을 경험했다. 부친이 정치풍파에 시달린 통에, 시 주석은 공산당 입당도 10차례나 거부당한 끝에 이뤘다.
시 주석은 1975년 베이징의 명문 칭화대학 화학공정계를 졸업한 뒤 국무원 판공청,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허베이성 정딩현 등 중앙과 지방 근무를 거친 뒤 대만과 마주한 푸젠성에서 리더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샤먼시 당 위원회 상임위원, 샤먼시 부시장, 푸젠성 성도인 푸저우(福州)시 서기, 푸젠성 부서기, 부성장, 성장 등의 직무를 맡으며 1985년부터 2002년까지 17년 동안 푸젠성에서 근무했다.
2002년 저장성으로 옮겨 대리성장, 서기를 지낸 시 주석은 2007년 3월 당시 터진 천량위 상하이시 당 서기 비리사건 이후 최고지도부로 가는 징검다리로 평가받는 상하이시 당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천량위 비위사건을 무리없이 수습한 그는 2007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최고 권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올라섰으며 이후 2008년 3월 국가부주석, 2010년 10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으며 후진타오 이후의 1인자 자리를 예약했다.
2012년 11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시 주석은 만인의 예상대로 중국 최고지도자가 됐다. 그 당시만 해도 시 주석이 10년 후 20차 당 대회에서 다시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지킬 것으로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집권기간 집단지도체제의 전통에서 빠르게 이탈하며 자신으로의 권력집중을 이뤘고, 대외적으로 '대국굴기'를 추구하며 개혁개방기 '도광양회(빛을 숨긴 채 실력을 키움)'를 유지해온 자신의 전임자들과는 결이 다른 대외 정책을 폈다.
다수 대중이 지지한 고강도 반부패 드라이브를 통해 만연했던 공직 사회 부패 문제를 개선하는 동시에 상하이방을 축으로 한 자신의 정적 그룹을 거의 뿌리째 뽑았다
최고 지도부 출신은 처벌하지 않는 전통을 깨가며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숙청하고 감옥으로 보낸 것은 시 주석 반부패 드라이브의 상징적 성과로 기록됐다.
대외적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본격적 대외 영향력 확대에 나서는 한편 미국을 향해 신흥 대국의 '지분'을 요구하고 나섰다.
시 주석이 2013년 방미 중에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신형 대국관계'를 만들자면서 "태평양은 미·중 양국을 모두 포용할 만큼 충분히 넓은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미국이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 세력으로 중국을 보기 시작한 계기이자, 미중전략경쟁 본격화의 씨앗을 뿌린 일로 평가된다.
대외문제에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갈등과 남중국해 암초 매립 및 군사기지화 등에서 보듯 자국 핵심이익으로 규정하는 사안에서 공격적인 외교 태세를 보이며 '전랑외교'라는 명사를 널리 보급했다.
또 홍콩 국가보안법 입법을 계기로 '홍콩의 중국화'를 빠르게 이뤄내고, 대만 통일에 대한 의지를 역대 어느 지도자보다 강력하게 표출했다.
미국과의 전략경쟁 속에 러시아, 북한 등 이웃 우방과의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고 개도국 그룹을 우군으로 삼아 미국에 맞서는 전략을 시종 견지했다.
장기집권을 향한 국내 권력 강화 조치도 착착 진행했다.
2017년 열린 직전 19차 당 대회 때 당장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는 문구가 명기되고, 이듬해 국가주석 3연임 제한 규정이 헌법에서 삭제된 것을 계기로 시 주석의 장기집권 의지는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의 3연임 시도는 작년 11월 나온 중국 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의 결의)를 통해 공식화했다.
중국 공산당 역사 '3분법'에 따라 자신의 역사적 위상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급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당 핵심 지위를 공고히 하는 내용과 자신으로의 권력 집중을 의미하는 '집중통일영도' 등을 역사결의에 명기함으로써 장기집권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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