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요일' 백기든 英총리 남긴 말은…"정치는 유혈스포츠"
트러스 사퇴 막전막후…새벽4시 사퇴문자 돌린 뒤 기자회견까지 긴박
실낱같은 희망 품었지만…평의원모임 대표 "신임투표 하면 패배" 쐐기
총리 질의응답·내무장관 경질·의회표결 대혼란 겹친 19일 '치명상'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양상추가 먼저 시드는지, 총리가 먼저 그만두는지 지켜보자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던 리즈 트러스(47) 영국 총리가 '검은 수요일'을 보낸 뒤 결국 백기를 들었다고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이 21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이 매체는 트러스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퇴 발표의 막전막후를 전하면서, 트러스 총리가 지난 19일 힘겨운 일을 여럿 겪으며 치명상을 입은 뒤 그날 밤을 지인들과 연락하면서 뜬 눈으로 지샜으며, 20일 오후 전격적으로 사퇴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야유로 점철된 하원에서의 총리 질의응답, 측근으로 꼽혔던 내무장관의 반발성 사퇴, 총리 신임투표와의 연계 여부에 대한 혼선으로 난장판이 된 하원 표결 등에 트러스 총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날 하원에서 진행된 총리 질의응답에서 의원들은 비난과 조롱을 쏟아내며 트러스 총리의 사퇴를 압박했고, 그의 측근으로 꼽혔던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은 트러스 총리의 국정 방향을 비판하면서 돌연 사표를 던졌다.
또한, 이날 하원에서 진행된 셰일가스 채굴을 위한 수압파쇄공법(fracking·프래킹) 금지법안에 대한 표결 과정에서는 심각한 잡음이 일며 트러스 총리의 입지가 이미 회복불능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해당 표결이 트러스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인지를 놓고 집권 보수당 내에서도 큰 혼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총리의 '우왕좌왕' 대응에 실망한 보수당 의원들이 트러스 총리에게 고성을 지르는 장면까지 목격됐다.
'검은 수요일'을 보내면서 사퇴 결심을 굳힌 그는 다우닝가 총리 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수 시간 전인 새벽 4시에 지인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자신의 결심을 미리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의 한 지인은 총리가 사퇴 전날 밤까지만 하더라도 상황이 급변하는 것에 불안감을 나타내긴 했지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내비쳤다고 밝혔다.
이 지인은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문자 메시지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며 "새벽 4시에 문자를 보내는 것은 좋은 신호는 아니다. 그때즈음 총리는 아마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인식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트러스 총리는 날이 밝은 뒤 자신의 거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로 마크 풀브룩 비서실장을 비롯해 측근들을 소집했다.
측근들은 이 자리에서 사퇴를 결정하기 전에 그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있는지를 당 대표 선거를 주관하는 보수당 평의원 모임 1922 위원회의 그레이엄 브래디 위원장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어 오전 11시40분께 브래디 위원장이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에 도착했지만, 총리실은 표면적으로는 이때까지도 트러스 총리가 물러날 계획이 없다고 말하며 총리의 사퇴 계획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정오가 조금 지난 난 12시25분 테리즈 코피 부총리가 총리 관저에 도착하고, 14분 후에는 차기 총리를 뽑을 선거의 감독을 맡게 될 제이크 베리 보수당 의장 등이 속속 회의에 합류하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트러스 총리의 측근들은 브래디 위원장이 트러스 총리의 거취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으나 브래디 위원장은 단호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트러스는 자리를 이어갈 만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거취를 결정할) 신임투표를 실시한다면 패배할 것"이라고 못박았다고 한 소식통은 전했다.
더 이상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한 총리실은 오후 1시15분 긴급 기자회견을 공지했다.
트러스 총리는 오후 1시30분 총리실 앞에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등장, "찰스3세 국왕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 선거 공약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물러난다"는 90초 간의 짤막한 연설로 '44일 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트러스 총리는 이날 오전 측근들에게 사퇴 결심을 이야기하면서 짐짓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는 '피비린내 나는 스포츠'(bloodsport)"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데일리메일은 이번 게임의 희생자는 트러스 총리라고 촌평했다.
ykhyun1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