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추운 겨울] ② 베를린 거리로 나선 사람들 "내게 가난이 닥쳤다"

입력 2022-10-19 07:12
[유럽, 추운 겨울] ② 베를린 거리로 나선 사람들 "내게 가난이 닥쳤다"

독일·이탈리아 경제 내년 스태그플레이션…"에너지 가격 고공행진 지속"

이탈리아 등 유럽내 극우세력 확장…헝가리·폴란드와 EU 분열 우려

(베를린=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난방비가 워낙 올라 매달 중순만 되도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사는 건 그림의 떡입니다"(엘케)

"항상 뼈 빠지게 일하지만, 물가가 급등해 딸이 학급여행이나 소풍 갈 때가 되면 그 돈을 어디서 구할지 너무 두렵습니다. 난방비와 월세를 내고 나면 딸 교육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은 1.36유로(1천800원)뿐입니다"(비켄)

"오늘도 슈퍼마켓에 서서 가격을 보고 거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오늘은 아이들이 수주간 노래를 불렀던 수박을 사주려고 했는데…"(루피)



지난 15일(현지시간) 오후 독일 총리실 앞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가 고조되면서 "내게 가난이 닥쳤다(#Ich bin Armuts betroffen)"이라고 쓰인 피켓을 든 인파 2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지난 5월 한 싱글맘이 작성한 트위터 글을 해시태그 하면서 시작돼 어느새 6만명 이상으로 불어난 '가난이 닥친' 이들은 정문 앞에 작은 무대를 설치하고, 한명 한명 무대에 올라 그동안 가슴에 담아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그동안 트위터에서 해시태그와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한 것이다.

'가난이 닥친' 이들은 트위터계정 소개글에서 "현재 독일에는 사상 최대인 1천380만명이 최저생계비로 버티고 있다. 최근 물가 급등으로 독일내 빈곤 위험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빈곤이 닥친 이들은 이미 매달 중순쯤 되면 어떻게 밥값을 난방비를 조달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구조를 위한 낙하산을 보내지 않는다면 독일 내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 스태그플레이션 빠지는 유럽경제…독일·이탈리아 직격탄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을 것을 걱정할 정도로 유럽경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불러온 에너지 위기에 벼랑 끝에 직면했다.

문제는 에너지 가격 고공행진이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내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간한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유로존(유로화사용 19개국)의 경제성장률이 올해 3.1%를 기록한 뒤 내년에 0.5%로 둔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은 올해 1.5% 성장에 그치고, 내년에는 0.3% 역성장해 경기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유로존내 꼴찌 성적이다.

올해 물가상승률은 8.5%, 내년에는 7.2%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한 것을 감안하면 경기침체 속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독일과 함께 제조업 비중이 큰 이탈리아도 올해 3.2% 성장에 이어 내년 0.2%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고, 더욱 악화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기타 고피나스 IMF 수석부총재는 독일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겨울은 힘들 테지만, 내년 겨울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면서 "에너지 위기는 빠르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에너지 가격은 장기간 고공행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유럽내 세력확장하는 극우…분열의 계기 되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장기화가 불러온 물가 급등과 에너지 위기에 생활고가 커지면서 유럽에서는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해 체코와 폴란드 등에서는 전국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는 물가와 에너지 요금에 따른 생활고에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이같이 분노한 민심은 표심으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지난 10일 치러진 독일 니더작센주의회 선거에서 극우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10.8%를 득표해 5년 전보다 득표율이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에너지 위기에 따른 물가 급등 속에 경제적 공포를 야기한 게 주효했다고 풀이된다.

지난달 25일 치러진 이탈리아의 조기총선에서는 극우세력이 주축이 된 우파연합이 승리했다.

무솔리니 집권이후 100년만에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l) 대표가 총리로 유력한 극우세력이 집권한 것이다.

이는 에너지 식료품 가격 급등에 따른 유권자들의 좌절감과 분노를 선거전에서 최대한 활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앞서 지난달 11일 치러진 스웨덴 총선에서는 신(新)나치에 뿌리를 둔 극우 성향의 스웨덴민주당이 20%가 넘는 득표율로 원내 제2당에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지난 6월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우파 전체의 간판이 됐다.

유럽연합(EU)의 정책 노선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폴란드, 헝가리에 극우가 집권한 이탈리아가 가세한다면 이는 대러시아정책 등을 둘러싼 EU 내 분열을 가속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yuls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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