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유전면제 무전입대'에 분노한 노동자들 나흘간 뉴욕을 불지르다
"부자의 전쟁, 빈자의 싸움" 구호…소집되더라도 돈 내면 면제
흑백 인종간 갈등도 배경…흑인들 잔혹하게 살해하고 관련 시설 파괴
'부분 동원령' 발동된 러시아도 거센 저항 직면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7월 13일 미국의 뉴욕시. 맨해튼 징병관 사무소에 수백명의 성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건물에 난입해 불을 지른 시위대는 출동한 소방대와 경찰을 무력화한 뒤 근처 경찰서, 소방서, 신문사 등도 파괴하고 방화했다. 수천명으로 불어난 폭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광기를 더해가며 주로 흑인인 희생자들을 구타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거나 산 채로 불태워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뉴욕 징병 폭동(New York City draft riots)은 이렇게 시작돼 남북전쟁의 최일선에서 빼낸 연방군 병력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나흘이나 계속됐다. 약탈, 방화, 린치가 난무한 아수라장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120명이 나왔다. 그러나 실제 인명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커서 일부 전문가는 2천여명이 숨지고 8천여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한다. 재산 피해도 막대했으며 특히 흑인 고아들을 수용했던 보육원에서 흑인들이 드나들던 사창가에 이르기까지 흑인 관련 시설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폭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근은 그해 3월 제정된 징병등록법(Enrollment Act)이었다. 이 법은 20~45세의 시민권자와 귀화를 신청한 이민자들 가운데 면제 대상자를 제외한 전원이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했으며, 등록된 사람들 가운데 군사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인원을 징집할 수 있도록 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징집은 19세기 말 프랑스 혁명정부가 최초로 시행했다고 하는데 미국의 경우 이때가 처음이었다. 독립전쟁 당시도 징집이 이뤄졌으나 주로 주 차원에서 민병대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양쪽 교전 당사자 모두 제대로 병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됐다. 인구와 경제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북군은 처음에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연방군과 주 민병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병력 손실은 커지는 반면에 자원입대자는 줄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전쟁의 규모가 커지는 상황에서 해결책은 전국적인 징병뿐이었다.
애국심이나 명예욕, 모험심 등에 이끌려 기꺼이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환영하는 이는 거의 없다. 남북전쟁 시기 징병제를 더욱 인기 없게 만든 요인은 '유전 면제' 정책이었다. 징병등록법은 등록된 병역 대상자 가운데 추첨으로 실제 입대자를 결정하도록 했지만, 이렇게 입영 대상으로 확정되더라도 대체인력을 구해 대신 입대시키거나 면제료를 내면 병역 의무를 면하게 해 줬다.
이런 정책에는 나름의 근거와 논리가 있었다. 대체자 입대 제도는 가족이나 마을의 형편에 따라 병역 의무 이행자를 자체적으로 고를 수 있도록 하던 옛 시절의 관습을 따랐다. 도저히 입대할 여건이 안 되는 사람을 억지로 군대에 데려다 놓으면 항상 탈영을 노리는 골칫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징병 대상자 대신 입대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라면 대가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국가에 돈을 내고 징집을 면제받을 수도 있었는데 금액은 당시 미국 노동자의 평균 연봉에 해당하는 300달러였다. 이는 병역 대체자에게 매겨지는 '시장 가격'의 상한선 역할을 했다. 국가가 지정한 면제료가 기준이 돼 개인적으로 대체자를 사는 가격이 한없이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대체자 입대나 병역 의무를 돈으로 갈음하는 제도는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이다. 최초의 전 국민 징병제를 채택한 프랑스도 이를 허용했으며 북군과 싸우던 남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역사적 연원이나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떻든 누군가가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는다는 사실에 입대를 앞둔 당사자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히 폭동 시기까지의 뉴욕이 배경인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잘 묘사하고 있듯이 아일랜드, 독일 등에서 갓 이민 온 노동 계층의 삶은 비참했다. 이민자 출신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두고 흑인들과 경쟁하는 처지였고 남부 지역의 흑인들이 해방돼 그나마 남은 일자리마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남북전쟁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원치 않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야 할 처지가 되자 백인 이민 노동자들의 분노는 한편으로는 징병제도를 향해, 다른 한편으로는 흑인들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뉴욕 폭동 당시 시위대의 구호였던 '부자의 전쟁, 빈자의 싸움'(A Rich Man's War and a Poor Man's Fight)이라는 말로 잘 요약된다. 전쟁을 벌인 것은 북부의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지만 막상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노동자들이라는 외침이다. 1863년과 1864년 징집 대상으로 결정된 사람은 75만명이었으나 실제 입대자는 4만6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85%는 이리저리 다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나머지 15%의 좌절감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뉴욕 폭동과 같은 대규모 저항 없이 징병은 계속됐지만, 힘없는 자신들만 총알받이가 되는 현실을 노동자들은 잊지 않았고 용서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도입된 새 징병법에는 대체자나 면제료에 관한 규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병역의 공정성에 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많은 이가 전쟁의 정당성에 큰 의문을 품었던 베트남 전쟁에 이르면 징집 거부 운동은 뉴욕 폭동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미국은 1972년 말 징병을 중단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전쟁 발발에 대비해 병역 대상자들을 등록하기는 하지만 실제 군 병력은 자원자들로만 채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뜻밖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고전하는 러시아가 병력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부분적인 동원령을 발동했다. 예비군 병력의 1%만 동원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뉴스 속의 일'로만 여겼던 전쟁이 눈앞의 현실로 닥친 러시아 국민, 특히 징집 대상이 될 수 있는 젊은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뉴욕 폭동에서 보듯 공정하지 못한 징집, 더구나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 때문이라면 국민적 저항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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