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보르도 와인도 콧대 낮추기…산불·가뭄에 재배기준 완화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지난 여름 세계 최고가 와인 중 하나로 꼽히는 '리베르 파테르' 포도밭 앞까지 산불이 들이닥쳤다.
기후 변화로 유럽을 덮친 폭염이 프랑스 포도주 산지인 보르도(Bordeaux) 지역까지 불태웠기 때문이다.
'리베르 파테르'를 만드는 로익 파스케는 시뻘건 화염이 소중한 포도송이를 집어삼킬까봐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 와인은 보르도산 중에서도 가격이 1병에 3만유로(약 4천100만원) 정도로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
하지만 미리 산불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방화용 참호를 파놓고, 쓰러진 나무를 쌓아둔 덕에 간신히 그의 포도밭을 지킬 수 있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파스케는 또 근처 호수에서 물을 퍼다가 주위 나무를 적셔놓기도 했다고 한다.
이같이 보르도 포도밭까지 기후 변화에 따른 폭염과 가뭄, 산불, 홍수, 산사태 위협에 시달리면서 와인 생산에 비상이 걸렸다고 WSJ은 전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농장주는 포도가 제대로 익기 수주 전부터 수확을 하거나, 기온이 낮은 곳으로 재배지를 옮겨가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 여파로 깐깐하기로 유명한 보르도 와인도 콧대를 낮추고 재배 기준을 대거 완화했다.
프랑스에서는 포도 품종, 재배 지역을 포함해 와인 생산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왔으나 지금까지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와인 생산 방식을 더는 고수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르도에서는 포도밭에 물을 대는 게 통상 금지됐지만 올해는 허용됐으며, 보르도산으로 인정되는 포도 품종으로 6종을 추가로 포함해줬다.
보르도 와인 전문가인 조지 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면서 "이번 결정이 적포도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비판적 견해를 내놨다.
보르도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남부는 산업화 이전보다 기온이 1.5도 올라 지구 평균 상승폭 1.1도를 웃도는 상황이다.
특히 와인으로 양조되는 포도는 날씨 변화에 극히 민감한데, 햇볕이 지나치게 강하면 포도가 달아올라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게 되고, 자칫 와인이라기보다 잼같은 풍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파스케는 "와인은 세계 어디에서라도 만들 수 있지만 좋은 와인을 만들 때는 수많은 정교한 세부 사항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여전히 실험 단계에 있다.
일부 농장에서는 겨울에 빗물을 모았다가 관개 시설로 보내기도 하고, 일부는 토양을 물을 덜 먹는 쪽으로 바꾸려 하기도 한다. 또 햇볕 노출을 줄이려 포도나무를 심는 방향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샹파뉴(Champagne)를 포함한 프랑스 북부에서는 아직은 기후 변화에 선방 중이라고 WSJ은 전했다.
올해 어린 포도나무와 달리 뿌리를 깊게 내리고 다 자란 포도나무에서는 껍질이 두껍고 알이 자잘한 포도가 많이 열렸다는 것이다.
샴페인 양조장 관계자는 "이제 지구 온난화 영향이 느껴지기는 한다"면서도 "하지만 아직 부정적 영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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