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풍 불라'…호주 총리, 여왕 서거에도 공화제 전환 신중 모드
여왕 서거에 "공화제 전환 논의 시작하자" 목소리 커져
1999년 개헌 선거에서 부결…지난 5월 조사서 호주인 53%. 찰스 국왕 반대
(자카르타=연합뉴스) 박의래 특파원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면서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삼는 호주가 공화국으로 전환할지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1901년 영국에서 독립한 호주가 여태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받들고 있는 건 여왕에 대한 호주인들의 존경과 애정 때문이었는데 그가 서거한 이상 더는 군주제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오래전부터 공화제 전환을 지지해왔고 취임 이후 개헌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도 호주의 공화제 전환 가능성에 힘이 실리는 요소다.
반면 애도 분위기 속에서 공화제 전환에 속도를 낼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어 앨버니지 총리 역시 속도 조절에 나서는 모습이다.
◇ 녹색당 중심으로 '공화제 전환' 시작 주장 이어져
13일 호주 일간 디오스트레일리아와 공영방송 SBS 등에 따르면 여왕이 서거하자 공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공화제전환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특히 좌파 정당이자 여당인 노동당과 사실상 연정 관계인 녹색당의 목소리가 크다.
파키스탄 출신의 녹색당 상원의원 메흐린 파루키는 여왕이 서거하자 트위터에 "인종차별 제국의 지도자를 애도할 수는 없다"라며 "우리는 원주민과의 조약, 영국 식민지에 대한 정의와 배상, 공화국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한다"라고 적었다.
리디아 소프 녹색당 상원의원도 트위터에 "우리 의회와 총리는 우리가 선출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속돼 있다"라며 "우리는 새로운 왕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이 뽑은 국가 지도자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애버리지니(Aborigine·호주 원주민) 출신인 그는 지난달 의회에서 선서하면서 여왕을 '식민 지배자'라고 칭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공화제 전환 지지 단체인 '리얼 리퍼블릭 오스트레일리아'는 "공화제 전환은 영국 왕실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영연방 54개국 가운데 이미 34개국이 공화제를 채택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에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왕의 서거라는 슬픔을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할 기회로 본다는 것이다.
녹색당 의원들의 주장에 국민당의 바나비 조이스 전 부총리는 "음감이 전혀 없는 음치 같은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알렉스 호크 자유당 하원 의원도 "오늘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예의도 없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 1999년 개헌 투표서 부결…총리 "첫 임기 중 개헌 없다" 신중론
호주에서 여왕 서거를 계기로 공화제 전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여왕이 호주 군주제의 상징과 같은 존재여서다.
호주에서는 1999년 국가 체제를 공화제로 전환하자는 개헌안이 발의됐고, 국민 투표에 부쳤지만 약 55%가 개헌안에 반대하면서 부결됐다.
여왕에 대한 호주인들의 존경과 애정 때문이었다. 맬컴 턴불 전 호주 총리는 많은 호주인이 군주제 지지자들이기보단 '엘리자베스인'(Elizabethans)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주 내 공화주의자들은 여왕 생전에 공화제 전환을 시도하기보단 찰스 왕세자가 왕에 오른 뒤에 이를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5월 호주 ABC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호주인의 53%는 찰스 왕세자가 국왕이 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지금 같은 추모 기간에 공화제 전환에 속도를 냈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디오스트레일리아의 칼럼니스트 닉 카터는 기명 칼럼을 통해 파루키 상원의원의 발언을 비판하며 "그러한 극단주의적인 말로는 (공화제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0'"이라고 적었다.
앨버니지 총리도 "지금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할 때"라면서, 자신의 첫 임기 동안에는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임기는 2025년 5월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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