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현장을 가다] 프랑스 '최고의 숲' 할퀸 '괴물 산불'
한 달 넘게 화마와 싸우는 지롱드…유럽 최대 사구 방풍림도 훼손
파리 면적 배 넘는 산림 소실…"건조하고 더워진 날씨 탓"
[※ 편집자 주 = 기후위기는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을 위한 전 세계적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기의 수위는 해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북미, 유럽, 아시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글로벌 특파원망을 가동해 세계 곳곳을 할퀴고 있는 기후위기의 현장을 직접 찾아갑니다. 폭염, 가뭄, 산불, 홍수 등 기후재앙으로 고통받는 지구촌 현장을 취재한 특파원 리포트를 연중기획으로 연재합니다.]
(랑디라·오스탱스·라테스트드뷔슈[프랑스 지롱드州]=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한 달 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숲속을 잠깐 거닌 것만으로 머리카락과 옷에 탄내가 잔뜩 배었다.
23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서남부 지롱드주(州)의 숲은 시커먼 잿더미로 뒤덮인 땅 위로 간신히 서 있는 나무에 달린 잎은 한여름인데도 죄다 갈색이었다.
숲길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간이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별장으로 썼을 법한 이 집을 지탱하던 벽은 나무로 만들었던 것인지 온데간데없고 지붕이 폭삭 주저앉은 채였다.
불길은 숲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 집터에는 양철 지붕과 난로, 울타리 그리고 소파였는지 침대였는지 모를 가구의 앙상한 틀만 남아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엔 작물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이는 밭이 있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흙더미 밑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낮이 될수록 매캐한 냄새가 콧속을 더 강하게 찔러 더는 숲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운동화에 묻은 잿가루를 연신 털어냈지만, 좀체 깨끗해지지 않았다.
랑디라 숲의 옆 마을 기요에서 30년 넘게 살았다는 질 파냐(60) 씨는 이 지역에 이따금 불이 난 적은 있지만 피신해야 할 정도로 큰불이 난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파냐 씨의 말대로 이번 산불이 태운 지롱드의 산림 면적은 사상 최대 규모다. 이달 20일 현재 267㎢가 불에 탄 것으로 집계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의 배가 넘고 서울의 절반 가까운 넓이다.
지롱드를 중심으로 이번 여름 프랑스 전체에서 서울 면적과 맞먹는 600㎢가 산불로 소실됐는데, 이는 2006∼2021년 15년간 연평균의 6배에 이른다.
현지 경찰은 랑디라와 그 주변에서 발생한 산불이 방화일 가능성도 의심하고 있지만, 산불 피해가 '역대급'으로 난 배경으로는 기후 변화가 지목된다.
동네 주민들은 올해 7∼8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건조했고,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고온이었던 탓에 울창한 숲에 불이 붙으면 폭발적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파냐 씨는 "고온 건조한 날씨가 산불 피해가 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명을 소방대원들한테 들었다"고 전했다.
지롱드 지역의 숲은 프랑스에서도 유난히 울창해 '포레 덱셉시옹'(Foret d'Exception)으로 불린다. '최고의 숲', '특별히 빼어난 숲'이라는 뜻이다.
1961년 이래 최악의 가뭄 속에 난 산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한 소방당국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를 '괴물 같은 산불'이라고 불렀다.
랑디라, 기요 옆에 붙은 생마녜, 오스탱스 등은 본래 우거진 녹음으로 여름철마다 캠핑족을 끌어들이는 마을이지만 올해는 숲이 타버려 손님맞이가 어려워졌다.
특히 아직 불길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오스탱스에서는 캠핑장을 폐쇄하고 소방 지휘 본부를 차렸다. 오스탱스의 자랑거리인 부스케 호수는 입구부터 막혀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현재 산불은 오스텡스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하는 탓에 소방당국은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헬리콥터를 띄워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오스탱스 소방서 관계자는 "지난달 중순만 해도 부스케 호수를 중심으로 동쪽에서만 불이 났는데 이달 초 폭염이 찾아온 이후 호수 서쪽으로 불길이 번졌다"고 설명했다.
불로 숲은 큰 피해를 봤지만, 인명피해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산불이 언제쯤 끝날 것으로 예상하느냐고 묻자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도 "한 번이라도 비가 크게 내리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최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와 지중해에 있는 코르스섬에는 폭풍우가 쏟아져 5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수백 ㎞ 거리를 두고 정반대 날씨로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 새삼 놀라웠다.
올여름 지롱드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한 곳은 랑디라와 라테스트드뷔슈 크게 두 곳이다. 모두 와인 산지로 유명한 도시 보르도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졌다.
라테스트드뷔슈에서는 연간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필라 사구가 유명한데, 이 명소 역시 화마를 피해 가지 못했다. 사구가 내륙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방어막 역할을 해주던 소나무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
23일 오전 찾아간 유럽 최대 해안 사구인 이곳은 여전히 관광객으로 붐볐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숫자가 많이 적어 보였다. 사구 바로 옆 캠핑장이 화재로 문을 닫은 영향도 있었을 테다.
지난해 5월 필라 사구를 찾았을 때만 해도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노상에 주차한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는데 이날은 휴가철임에도 주차할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남부로 여름 휴가를 왔다는 법대 교수 마리아(50) 씨는 기사로만 접했던 필라 사구 화재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스페인도 그렇고, 프랑스도 그렇고 이번 여름은 무척 건조하고 더웠다"며 "숲에서 불이 한 번 나면 이렇게 폭발적으로 번지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서쪽 브르타뉴 지방에서 왔다는 엘로디(27) 씨에게 지난해 촬영한 방풍림 사진을 보여주자 "확실히 소나무가 푸르렀을 때가 더 보기 좋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엘로디 씨는 그동안 기후변화가 심각한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시큰둥했는데 프랑스에 폭염, 가뭄, 폭풍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올해 여름을 계기로 마음가짐을 바꿨다고 한다.
"날이 덥건, 불이 나건, 비가 내리건 별개의 일로 여겨왔는데 모든 것이 한 번에 들이닥치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젠 작은 것이라도 환경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할 듯해요."
run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