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슈디 피습에 1991년 '악마의 시' 日번역가 피살 재조명
용의자 특정안돼 영구미제…표현의 자유 논의 아예 실종
노르웨이·이탈리아 번역가 등도 흉기·총기·방화 공격받아
(서울=연합뉴스) 정빛나 기자 = 소설 '악마의 시' 작가 살만 루슈디(75)의 흉기 피습을 계기로 과거 그의 소설 번역가들을 노린 폭력사건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영구 미제로 남은 1991년 7월 일본 쓰쿠바대 교정에서 발생한 '악마의 시' 일본어판 번역가 이가라시 히토시 피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가라시는 당시 대학 강의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선 뒤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흉기 공격을 받아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목, 얼굴, 손 등이 흉기에 찔렸고, 그가 들고 있던 갈색 가죽 가방에는 흉기 공격을 막으려 애쓴 듯 여기저기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그가 번역한 일본어판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당시 이란 최고지도자가 악마의 시 소설을 무슬림 신앙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고, 루슈디와 출판에 관여한 이들에 대한 처형을 명령한 '파트와' 선포 이후 출간됐다.
종교적 이유가 범행 동기가 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이유다.
실제 이가라시가 생전에도 이슬람 과격분자들에 의해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한때 경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은 '악마의 시' 번역과 피습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결국 피습 사건 용의자는 한 차례도 검거되지 않았고, 공소시효는 2006년 만료됐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수사당국이 쓰쿠바대에 다니던 방글라데시 국적 학생을 용의자로 한때 특정했지만, 일본과 이슬람 국가 간 외교 관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 당국의 '압박'에 사실상 유야무야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아울러 방글라데시인 학생이 용의자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난 적도 없다고 NYT는 전했다.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IEEJ)에서 이란 정치학을 연구하는 사카나시 사치 연구원은 "가해자가 당시 붙잡혔다면 이를 계기로 종교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짚었다.
피해자가 숨지지는 않았지만 '악마의 시'와 관련된 유사한 사례는 더 있었다.
이가라시 피살 불과 며칠 전에는 이탈리아판 번역가 에토레 카프리올로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흉기 공격을 당했지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93년 7월에는 튀르키예(터키) 소설가인 아지즈 네신이 소설 발췌 부분을 번역해 현지 신문에 게재했다가 투숙하던 호텔 방화에 간신히 탈출하는 일도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노르웨이판 출판가인 윌리엄 니가드가 노르웨이 오슬로 자택 근처에서 세 차례 총에 맞았다.
이와 관련 니가드의 변호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과 관련해 2명이 기소됐고, 이 가운데 1명은 사건이 벌어진 1993년 노르웨이를 떠난 전직 이란 외교관이 포함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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