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은 물가고로 신음하는데…떼돈 번 석유업계에 역풍 부나

입력 2022-08-03 05:45
서민은 물가고로 신음하는데…떼돈 번 석유업계에 역풍 부나

英, 석유·가스업계에 횡재세 부과…국내 정치권도 도입 논의

정유업계 "일시적 현상만으로 판단 곤란…하반기엔 둔화 우려"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고유가와 인플레이션으로 세계 각국의 서민과 중산층 가계가 신음하는 가운데 거대 석유업체들이 '떼돈'을 번 것으로 나타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세계 1∼5위 석유기업인 엑손모빌, 셰브런, 셸, BP, 토탈에너지는 지난 2분기에만 약 600억 달러(약 78조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5개사 합산 분기 실적으로는 역대 최고치다.

국내에서도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2분기에 역대 최고 실적을 거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고유가로 촉발된 인플레이션으로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고가 가중된 상황에서 거대 석유회사들이 큰 돈을 번 것으로 나타나자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사양산업 취급받았는데…석유 공룡들, 2분기에 역대급 '돈잔치'

3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뉴욕타임스(NYT),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엑손모빌은 지난 2분기에 178억5천만 달러(약 23조3천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엑손모빌의 역대 최고 분기 순이익으로, 작년 동기 46억9천만 달러의 거의 4배에 가까운 규모다.

2분기 매출은 1천156억 달러(약 151조1천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 677억 달러의 두 배에 육박했다.

셰브런도 2분기에 역대 최고인 116억2천만 달러(약 15조2천억 원)의 순이익과 650억 달러(약 85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밝혔다.

앞서 유럽 최대 석유회사인 셸도 지난 분기에 역대 최고 수준인 115억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고, 프랑스의 토탈에너지는 작년 동기의 3배에 육박하는 98억 달러의 순이익을 2분기에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NYT는 엑손모빌, 셰브런, 셸, BP, 토탈에너지 등 글로벌 '빅5' 석유업체의 2분기 합산 순이익이 약 6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떨어졌던 2020년 4분기만 해도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며 사양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석유업계의 이런 반전은 격세지감이다.

대런 우즈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견조한 2분기 실적은 수요가 거의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는데도 공급은 부족한 글로벌 시장 환경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국내 정유업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최대 정유업체인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분기에 매출 19조9천53억 원, 영업이익 2조3천292억 원의 실적을 기록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역대 최고치다.

분기 기준 사상 최고였던 지난 1분기 실적(매출액 16조2천615억 원, 영업이익 1조6천491억 원)도 뛰어넘었다.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도 2분기에 각각 1조7천220억 원과 1조3천703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면서 사상 최고 분기 실적 기록을 새로 썼다.

아직 실적을 발표하지 않은 GS칼텍스도 고유가 추세로 인한 정제마진 상승효과에 힘입어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거뒀을 것으로 추정된다.

SK이노베이션은 "지정학적 이슈로 인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 불안과 코로나19 완화 등 영향으로 정제마진이 개선됐다"며 "특히 석유제품 수출이 많이 증가한 것이 실적 개선의 주요인이 됐다"고 밝혔다.

◇ 국내외서 '횡재세' 논의 촉발…정치적 역풍 조짐에 석유업계 '긴장'

기업이 사업을 잘해 호실적을 거둔 것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석유업계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기록적인 고유가 추세는 석유업계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지만 극심한 물가고에 시달리는 서민과 중산층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촉발된 민심의 동요는 자칫 정치적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어 정치권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4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으로 오는 11월 중간선거 패배에 직면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엑손이 신(神)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바이든은 메이저 석유회사 경영진들에 서한을 보내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에 평균을 훨씬 넘어서는 정유 이익 마진이 미국의 가정들에 직접 전가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기업들의 탐욕을 비판하기도 했다.

스리랑카에서는 물가 급등으로 생활고에 내몰린 국민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대통령이 하야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NYT는 고유가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거대 석유업체들이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 지도자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이미 영국 정부는 셸과 BP 등 고유가로 떼돈을 번 자국 석유업체와 가스업체에 대해 5억 파운드(약 7천900억 원)에 달하는 '횡재세'(windfall tax)를 물리기로 했다.

영국 정부는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을 폭등한 물가 탓에 생활고를 겪는 약 1천600만 명의 저소득 계층을 지원하는 데 쓸 예정이라고 CNN은 전했다.

국내에서도 고유가로 큰돈을 번 정유업계가 고통 분담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최근 "정유사의 초과 이익을 최소화하거나 기금 출연을 통해 환수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지난달 최고위원회의에서 "세수 부족 우려에도 정부는 유류세 인하 폭을 최대한 늘렸다"며 "정유사들도 혼자만 배를 불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정유업계는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업은 경기 사이클에 따른 부침이 큰 업종"이라며 "코로나19 사태로 석유 수요가 급감했던 2020년 업계는 5조원대 적자를 기록했지만 정부 지원은 전혀 없었는데 일시적 호황으로 이익이 커졌다고 '횡재세'를 물리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말했다.

이미 올 하반기만 해도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석유 수요가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 일시적 현상만으로 폭리 여부를 판단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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