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현장을 가다] 알프스 만년설이 자갈밭으로…빗물처럼 녹는 빙하

입력 2022-08-01 10:20
수정 2022-08-28 17:56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알프스 만년설이 자갈밭으로…빗물처럼 녹는 빙하

내년에 빙하 끄트머리 보려면 지금보다 30m 더 올라가야

현지가이드 "해마다 길어지는 탐방로는 빙하 장례행렬"

[※ 편집자 주 = 기후위기는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을 위한 전 세계적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기의 수위는 해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미주, 유럽,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글로벌 특파원망을 가동해 지구촌 곳곳을 할퀴고 있는 기후위기의 현장을 직접 찾아갑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는 스위스 알프스 빙하 두 곳을 취재한 르포를 시작으로 폭염, 가뭄, 산불, 홍수 등 기후재앙으로 고통받는 지구촌 현장을 취재한 특파원 리포트를 연중기획으로 연재합니다.]



(그라우뷘덴·발레[스위스]=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 "과거엔 여기 바로 앞에서 빙하를 봤죠. 하지만 이젠 족히 1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야 겨우 볼 수 있답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스위스 동남부 그라우뷘덴주에 진입한 뒤 구불구불한 포트레지나 지역의 산악 도로를 타고 2시간을 꼬박 차로 달렸다.

알프스 베르니나 산맥의 팔뤼봉(峰)을 오르다 보면 해발 2천500m쯤 자리 잡고 있는 모테라치 빙하. 동일한 이름의 모테라치 역(驛) 부근에 차를 세우고 안내소를 찾으니 안전 장비를 잘 갖추고 3∼4㎞ 더 등반해 올라가라는 안내를 들었다.



◇ 코앞에 있던 빙하 1시간 걸어가야 보여…"얼음 소실 최근 부쩍 빨라져"

1910년 모테라치 역이 세워진 곳은 당시 빙하설(舌)의 끄트머리였다.

빙하설은 알프스 산봉우리에서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려 오는 빙하의 모습이 마치 혀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산악열차를 타고 내린 관광객들이 코앞에서 빙하를 볼 수 있도록 모테라치 역은 빙하설에서 가장 가까운 최근접지에 세워졌다.

그러나 100년 넘는 기간에 빙하설은 해마다 짧아졌고, 빙하에 닿으려는 사람들은 모테라치 역에서 내려 봉우리 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코스였던 탐방로가 이젠 1시간짜리 등반 코스가 될 만큼 빙하의 '혀'는 무려 3㎞ 넘게 사라져 버렸다.

탐방로는 과거 얼음에 뒤덮였던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산길처럼 변모했다. 자갈이 쌓인 길 양옆으로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풀들이 뒤덮였다.



팔뤼봉 정상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걸었다. 길가에는 산 정상에서 녹아내린 빙하 담수가 바위층을 타고 계곡물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1910년 이후로 741m 후퇴(1950년)', '1천687m 후퇴(1980년), '1천870m 후퇴(2000년)'. 등반로를 따라 걷다 보니 과거 '빙하설이 여기까지는 있었다'고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중간중간 눈에 들어왔다.



촬영을 병행하며 걷다 보니 2시간 만에 빙하설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눈부신 얼음층이 덮인 곳이라기보다 거친 자갈밭에 잿빛 얼음이 섞인 땅을 딛고 서 있었다.

빙하 녹은 물이 쉴새 없이 흘러 스며든 땅은 발이 질퍽거릴 정도였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빙벽은 이미 갈라진 채 녹고 있었다.

시선을 한참 들어 올려 팔뤼봉 정상을 바라보면 흰 만년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곳으로부터 따라 내려오는 빙하설은 유럽에서 장시간 이어진 폭염의 기세 속에 겨우 명(命)을 이어가는 듯했다.

"내년에 빙하의 끄트머리를 다시 찾으려면 지금 그 자리보다 30m 이상 더 올라가야 할 겁니다."

탐방객을 안내하던 가이드 마리우스 카마티아스 씨가 건넨 말이다. 그는 "해마다 길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을 두고 '긴 장례행렬' 같다고 말하곤 한다"고 했다. 점점 자취를 감추는 알프스의 빙하를 이젠 추모해야 할 지경이 됐다는 뜻으로 들렸다.



◇ 얼음 있던 자리엔 큰 담수 웅덩이…동굴 속 빙하 녹은 물, 비처럼 떨어져

모테라치 빙하에서 차로 3시간30분 떨어진 스위스 발레주(州) 중부 알프스 푸르카 고개의 론 빙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해발 2천200여m에 위치한 이곳 역시 산을 덮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야 할 정도의 고산지대였지만 빙하는 무섭게 사라지고 있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자갈 밭을 한참 걸어 들어가 보니 론 빙하 주변에 큰 담수 웅덩이가 조성돼 있었다. 그 가운데 폭 2m가량의 얼음덩이가 앙상하게 떠 있었다.

2013년 여름에 촬영된 빙하 사진과 동일한 장면을 포착해 봤더니 절반 정도는 얼음층이 있던 8년 전 모습과는 달리 론 빙하의 현재 모습은 평범한 호수에 가까웠다.

빙하설에서 산봉우리 쪽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빙하가 남아 있지만, 흰색 천막으로 덮어져 있었다. 햇빛을 반사해 어떻게든 유실을 막아보겠다는 필사적인 시도다. 하지만 천막 아래를 살펴보면, 빙하는 쉴새 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특히 천막 밑 빙하 동굴은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이 꼭 들어가 사진을 찍는 곳이지만, 지금은 촬영이 불편할 정도로 녹은 물이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수돗물 새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무판자를 깔아놓은 동굴 바닥은 빗방울처럼 떨어진 빙하수에 질척거렸고, 녹아내린 동굴 천장에는 곳곳에 큰 구멍이 생겨 천막이 고스란히 보였다.

촬영장비를 들고 이곳을 찾은 탐방객 노마 렌더만(44)씨는 "지난해 오스트리아 쪽 빙하도 다녀왔는데 빙하가 녹아 안 보이긴 마찬가지였다"며 "천막을 쳐 놓는다고 해서 기후변화를 거슬러 빙하를 되살리긴 어려워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저 동굴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이제 탐방객들이 빙하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빙하가 없어지는 걸 보러 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라고도 했다.



◇ 빨리 사라지는 알프스 빙하…"예상 못할 부작용 낳을 것" 위기감

기후변화 속에 빙하가 점점 사라지는 건 알프스에선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다른 빙하보다 급격하게 소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루 평균 5cm씩 빙하설의 경계선이 후퇴하고 있는 모테라치에서 올해 빙하 소실 규모가 60년 만에 최대폭에 달했다는 스위스 빙하감시센터·브뤼셀 자유대학교의 연구결과는 여러 빙하 중에도 알프스 빙하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키운다.

원래부터 얼음층 규모가 적은 편이었는데, 지구 온난화 속에서 수년째 이어지는 겨울 적설량의 감소와 여름 폭염으로 얼음층은 더 줄어들었다.

흰 눈과 얼음이 태양 빛을 반사하며 빙하를 유지해주는데, 그 양이 해마다 급격히 줄다 보니 그만큼 얼음이 더 녹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곳이 알프스다. 학계에선 2100년이면 알프스 빙하의 80%가 없어질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빙하의 소실은 관광객이 감소한다거나 계곡물이 불어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부작용을 자연에 끼칠 수 있다.

7월 초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산맥 최고봉인 마르몰라다에서 11명의 사망자를 냈던 빙하 붕괴 사고는 기후위기가 몰고온 재앙에 대한 경각심을 더 키웠다. 스위스에서도 올해 들어 붕괴 우려가 있는 빙하 지역 곳곳에서 입산이 통제되고 있다.



prayer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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