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기후변화 불신 아직 득세…"석유공룡 90년대 여론전 잔재"
최근 기후재난 속출에도 '과학자 거짓말 한다' 의심
"'평범한 시민' 노려 불신 주입하는 업계 생존전략 탓"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미국을 중심으로 짙게 존재하는 기후변화 불신론이 1990년대 미국 석유업계 여론전의 잔재라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은 세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폭염 같은 극단적 기상이 더 자주 심하게 닥치지만 이를 기후변화 결과로 보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적다.
현재 대다수 과학자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때문에 폭염, 가뭄, 폭우, 혹한 등의 강도와 빈도가 높아진다고 본다.
그러나 이를 중대 위협으로 체감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다른 선진국보다 낮은 데다가 이를 적극 부정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크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2020년 기후변화 인식도를 보면 미국에서 기후변화를 중대 위협으로 여기는 이들의 비중은 62%였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한국, 일본 등에서 그 비중이 80% 이상이라는 점, 중간값이 70%라는 점을 고려할 때 현격한 인식차가 드러난다.
특히 미국에서는 기후변화가 아예 위협이 아니라고 보는 이들은 14%로 조사대상 14개 선진국 가운데 최고였다.
최근 영국 런던의 폭염, 미국 알래스카의 산불, 호주의 홍수 등 재난이 속출하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목소리도 눈에 띈다.
미국 과학·환경정책연구소(SEPP)는 최근 뉴스레터를 통해 과학자들이 모두 틀렸다며 "기후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총기난사와 함께 미국의 '예외주의'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는 이 같은 기후변화 불신의 뿌리로는 미국 에너지 업계가 지목된다.
AP통신은 국제사회가 1998년 교도의정서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에 합의했을 때 업계가 꺼내든 전략이 지금도 영향을 미친다고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익단체인 미국석유협회(API)의 당시 대응 문건에는 과학에 대한 불신을 대중에 심는다는 전략이 담겼다.
"평범한 시민들이 기후과학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해야 승리할 수 있다. 기후변화가 하찮은 주제가 되지 않으면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이 문건에는 ▲ 기후변화 증거의 신뢰성 깎아내리기 ▲ 상반된 견해를 함께 강조해 물타기 ▲ 탄소배출 감축 주장자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로 규정하기 등 언론인과 대중의 인식을 조작할 구체적 수법도 담겼다.
AP통신은 미국 석유업계가 이 전략을 토대로 1990년대 이후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후변화 불신 캠페인을 벌이고 싱크탱크에 돈을 주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과학계 소수설을 홍보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기후대응을 지지하는 싱크탱크 에너지정책연구소의 데이브 앤더슨은 "허위정보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라고 그 시절을 진단했다.
석유업계의 여론전을 추적해온 벤 프랜타 스탠퍼드대 연구원은 "화석연료 업계가 수십년간 실행해온 캠페인의 틀에서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화석연료 업계가 1990년대에 조작한 과거의 논쟁 안에 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석유업체들은 극단적 기상이 빈발해 기후변화의 위험이 체감되기 시작하자 이미 신속히 태세전환을 마친 것으로 관측된다.
석유업계는 기후에 민감해진 주주나 국제사회 규제 강화를 곁눈질하며 여론전을 부인하고 신재생에너지 투자, 기후변화 우려를 강조한다.
미국의 대표적 '석유공룡' 엑손모빌의 최고경영자 댄 우즈는 작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기후변화의 현실과 위험을 오랫동안 인정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에 기반한 주류과학 앞에 언제나 진솔했고 기후위험 해소를 위해 심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평범한 보수적 미국인들에게서는 그런 기업인들 같은 태세 전환이 관측되지 않는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의 작년 설문결과를 보면 공화당 지지자 중 기후변화를 사람이 초래한 결과로 보는 이들은 32%로 2003년 52%에서 크게 줄었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는 그 비중이 같은 기간 68%에서 88%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변화 예산이 의회에서 삭감되고 미국 연방 대법원이 정부의 기후대응 권한에 제동을 건 최근 사태도 석유업계가 남긴 잔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관측이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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