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잊어선 안될 영웅들…화강암 위에 4만여명 전사자 이름 빼곡히

입력 2022-07-21 07:00
수정 2022-07-21 10:36
[르포] 잊어선 안될 영웅들…화강암 위에 4만여명 전사자 이름 빼곡히

27일 제막 앞두고 미리 가 본 美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시민들 "이 곳은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는 곳…전쟁 영웅들 기억해야"



(워싱턴=연합뉴스) 이상헌 특파원 = "ROBERT E DIXON, CURTIS L DALE, BOBBY G COVER, YEONG-JUN DO…"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새겨진 이름들. 잊혔던 그날의 영웅들.

20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DC 한복판 내셔널 몰에 위치한 한국전쟁 기념공원.

작년 3월 16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먼지가 날렸던 이곳이 마침내 16개월여 만에 새 단장을 마치고 숭고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념공원의 중앙에 새 조형물이 들어선 것이다. 이름하여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

높이 1m, 둘레 50m의 단단한 짙은 회색의 화강암 벽이 기존에 있던 연못 '기억의 못'을 둥글게 에워쌌다.

화강암 벽엔 한국전쟁 때 숨진 미군 3만6천595명과 배속돼 함께 싸우다 희생된 한국 카투사 7천174명 등 4만3천769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전쟁 관련 서류와 유족들의 가슴속에만 묻혀 있다가 세월의 흐름 속에 가물가물해지던 한국전쟁 영웅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외국 군인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처음이다.



미국의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이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최종 마무리 단계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추모의 벽은 오는 27일 한국전쟁 정전기념일 69주년에 제막식을 하고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완공식을 일주일 앞두고 찾은 현장은 일부 비닐로 덮인 부분과 공사 석재가 일부 남아 있었다.

일부 시설엔 가림막을 쳐놓았고, 출입구를 막아 아직은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추모의 벽과 '기억의 못'으로 이름 붙은 연못 사이에는 사람들이 앉아 관람하거나 쉴 수 있도록 7개의 화강암 벤치도 비치됐다.

새로 심은 28그루의 나무는 전사자를 추모하며 명복을 빌듯이 추모의 벽에 새겨진 용사들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간에도 추모의 벽을 둘러볼 수 있도록 조명 시설도 곳곳에 설치됐다.



연못 앞의 또 다른 화강암 벽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선명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또 연못 바로 옆 바닥 난간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및 유엔군 전사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의 숫자와 참전국명이 적혀 있다.

한국전쟁 기념공원의 상징물인 실물 크기의 '19인 용사상'은 그대로 예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용사상과 추모의 벽이 어우러지면서 좀 더 완벽한 '기억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느낌이었다.



느지막한 오후 섭씨 30도를 훌쩍 넘는 불볕더위 속에 많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기념공원을 찾은 마이크 몰리 씨는 어린 아들 잭에게 이곳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기자에게 자신의 부친과 장인 모두 베트남전 참전용사라고 소개한 그는 "이곳에 와보면 전쟁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게 된다"며 "당신은 한국 사람이라 더 잘 알겠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조성된 추모의 벽을 보면서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라며 "조명이 켜진 밤에 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브렛 파커스트 씨는 홀로 추모의 벽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한참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여기는 중요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완공된 추모의 벽이 너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이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 너무나 엄청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발생했는데 그것은 중국과의 초기 갈등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더욱 중요해진 것 같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파커스트 씨는 자신의 부친이 해군에서 복무한 것을 어린 시절부터 봐왔다면서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지난 1995년 7월 27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헌정됐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참전비 등에는 전사자 명단이 있지만 한국전 기념비는 그러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추모의 벽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16년 10월 미 의회가 추모의 벽 건립법을 통과시켰고 한국 국회도 그해 11월 건립지원 촉구 결의안을 처리했다.

추진 주체는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이지만, 한국 정부가 건립 예산 2천420만 달러(약 316억 원) 중 직접 공사비 2천360만 달러를 부담하는 등 전폭 지원했다.



작년 착공식 땐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 지금은 고인이 된 19인 용사상 모델 중 한 명인 윌리엄 빌 웨버 퇴역 대령 등이 참석했다.

한미동맹재단과 향군 등도 마음과 정성을 모아 추모의 벽 건립에 기여했고, '한국 사위'로 잘 알려진 공화당의 차기 대선 후보군인 래리 호건 메릴랜드주지사도 25만 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한국 정부는 이번 추모의 벽 완공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좀 더 잘 알게 되고, 나아가 양국 국민간 우호가 증진되며,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토대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브라질 군인 출신이라고 밝힌 페르난도 씨는 "이곳은 자유를 위해 북한에 맞서 싸운 것을 기념하는 장소로 안다"며 "전쟁 영웅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 틸럴리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 이사장은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미동맹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모범적 동맹"이라며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이 전우들과 함께 추모의 벽에 새겨진 것을 보고 전사자 가족들이 평온을 찾길 기대하며,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것도 각인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honeyb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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