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라비다] '집' 떠나는 찰코의 소녀들…"꼭 다시 돌아올 거예요"
마리아수녀회 운영 멕시코 기숙학교 '찰코 소녀의 집' 졸업식
동고동락한 졸업생 520명 세상 속으로…"잊지 못할 5년"
[※ 편집자 주 : '비바라비다'(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중남미에 거주하는 한인,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을 포함해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찰코[멕시코]=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지난 12일(현지시간) '찰코 소녀의 집'의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했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 교복에 깨끗한 흰 양말과 검정 단화를 신은 학생들은 줄 맞춰 강당을 오갔고 합창단, 무용단, 고적대 등 공연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막바지 연습에 열중했다.
멕시코 멕시코주 찰코에 위치한 찰코 소녀의 집 졸업식 날이었다.
찰코 소녀의 집은 1964년 한국서 창설된 마리아수녀회가 1991년 세운 기숙학교다. 학업의 의지는 강하지만 가정 형편 등이 여의치 않은 멕시코 전국의 아이들을 선발해 중·고등학교 과정을 전액 무료로 제공한다.
1년에 두 번의 짧은 방학을 제외하곤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함께 살며 수업을 받기 때문에 6년 과정을 5년으로 압축해 승인받았다.
이날 졸업생은 중학교 670명과 고등학교 520명이었다. 중학교 졸업생들은 방학 후 돌아와 고등학교 과정을 이어가지만,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5년을 보낸 학교 겸 집을 아주 떠나게 된다.
코로나19 탓에 학부모를 부르지 못한 졸업식장엔 전교생 3천400명과 교사, 직원, 수녀들, 일부 후원자들이 자리했다.
학생들의 전통춤과 합창 공연 등이 이어져 졸업식은 지루할 틈이 없었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우수 학생을 시상할 땐 모든 졸업생이 함께 기뻐했다.
졸업식의 절정은 찰코 소녀의 집만의 졸업 노래였다.
팝송 '시즌즈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을 개사한 작별의 노래 1절을 졸업생들이 합창하고, 무대 위에 선 60여 명의 수녀가 답가처럼 2절을 불렀다.
"우린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랑하는 법을 배웠지. 잘 가렴. 너희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단다."
5년간 엄마가 돼 준 수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이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졸업식이 끝나고 한국 트로트 노래 '힘을 내세요' 연주에 맞춰 재학생들이 퇴장한 후 강당 안엔 눈물과 웃음이 뒤섞였다.
친구들을 안고 눈이 빨개지도록 운 아딜레네(17)는 "기뻐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신티아(17)는 "굉장히 큰 한 걸음을 내디딘 기분"이라며 "이곳에서의 5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시골 출신인 찰코 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거나 형제자매가 많아 학업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찰코 소녀의 집이 준 기회는 그만큼 소중했다.
방학 동안 가정이나 마을에서 폭력에 노출됐던 아이들도 학교로 돌아오면 서서히 환한 미소를 되찾고, 바깥의 여느 10대보다 밝고 예의바른 찰코의 소녀가 된다.
오악사카주 출신의 베치(17)는 "고향에도 고등학교가 있긴 한데 질 좋은 교육을 받긴 어렵다. 여기선 무료로 수준 높은 교육을 해주니 학생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며 "처음엔 가족들을 떠나 새로운 이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무사히 마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찰코 소녀들은 정규 교육과정 외에 무용, 악기, 축구 등 다양한 예체능 활동도 하고, 고등학교에선 회계, 정보통신, 요리, 섬유 제조 등 4개 전공으로 나뉘어 전문 직업교육도 받는다.
세상에 맞설 무기 하나씩 갖춘 데다 또래보다 1년 먼저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졸업 후 계획을 묻자 대부분 '공부'와 '일'을 동시에 말했다.
정보통신을 전공한 베라크루스 출신의 코랄은 "식당에서 일하면서 대학에 진학해 범죄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찰코 소녀의 집 설립부터 함께 한 마리아수녀회 중남미공동체 대표 정말지 수녀는 "졸업생의 40%가량이 대학에 진학한다"며 "학생들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비율도 일반 학교보다 훨씬 낮다"고 전했다.
이곳에는 정 수녀 외에도 한국서 파견 온 수녀들이 필리핀, 멕시코 등의 수녀들과 더불어 학생들과 함께 생활한다.
브라질서 16년간 봉사하다 지난해 이곳에 온 이 데레사(78) 수녀는 "아이들 속에서 지낼 수 있어 늘 행복하다"고 했다.
3천여 명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살림은 늘 빠듯하지만, 세계 각국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멕시코 진출 한국 기업들과 한국대사관 등도 큰 힘이 돼 준다. 이날 졸업식에선 체육 우수 학생 3명이 포스코가 선물한 태블릿PC를 받았다.
마리아수녀회는 미국 출신 알로이시오 슈월츠(한국명 소재건·1930∼1992) 신부가 6·25 전쟁 후 부산에 파견돼 고아들을 돌보며 만든 수녀회로, 한국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서 아동 복지 사업을 펼친다.
중남미엔 브라질, 과테말라, 온두라스에도 각각 소년·소녀의 집이 있는데, 가장 먼저 설립된 찰코 소녀의 집 졸업생만도 3만여 명에 달한다. 그동안 이곳 출신들은 정치인, 의사, 교사 등 다방면으로 진출했다.
태권도와 한국 노래를 배우며 한국과 가까워진 아이들은 졸업 후 한국서 유학하거나 한국 관련 일을 하기도 한다.
5년간 머문 둥지를 떠나는 학생들은 작별의 아쉬움만큼이나 긴장 섞인 설렘도 느낀다.
몬세라트(17)는 "알지 못했던 것들에 부닥쳐야 한다는 생각에 무섭기도 하고 긴장도 된다"고 했다. 정말지 수녀는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달렸다. 너희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며 격려했다.
이틀 후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졸업생들은 꼭 찰코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한다.
회계 전공 우수 학생 표창장을 받은 자켈린(18)은 "많이 도와줬던 분들, 함께 살던 친구들이 너무 그리울 것"이라며 "대학교를 마친 후 돌아와 고마움을 전하고 내가 이룬 것을 함께 나누겠다"고 힘줘 말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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