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고에 허덕이는 리비아 시민의 '분노'…의회·관공서 습격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장기내전과 극심한 정치 분열이 부른 생활고에 분노한 리비아 시민들이 의회와 관공서를 습격하면서 유엔 등 국제사회가 깊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3일(이하 현지시간)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리비아 전역에서 지난 1일부터 생활고와 정치 불안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주요 도시에서 이어지고 있다.
동부의 항구 도시 투브루크에서는 지난 1일 밤 민주적 선거 실시 등을 촉구한 시위대가 리비아 의사당에 난입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2011년 민중 봉기가 시작된 동부 벵가지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단전(斷電) 사태에 항의했고,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시위대가 밤이 되자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를 불태웠다.
관공서를 타깃으로 삼은 공격적인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제3의 도시 미스라타에서도 시위대가 도로를 봉쇄하고 시 청사에 불을 질렀고, 사하라 사막 깊숙이 자리한 세브하에서도 시민들의 손에 불타는 관공서의 모습이 현지 방송에 보도됐다.
리비아는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여파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무장세력이 난립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됐다.
유전지대가 많은 동부를 장악한 하프타르의 리비아 국민군(LNA)과 유엔의 인정하에 수도 트리폴리를 통치하는 리비아 통합정부(GNA) 간 내전으로 민간인 등 1천여 명이 희생됐다.
LNA의 수도 트리폴리 장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양측은 2020년 10월 유엔의 중재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이어 선거 일정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후원 속에 지난해 12월로 예정됐던 선거는 결국 치러지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2개의 정부가 대립하고 정치세력간 총격전이 빈발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사이 리비아 시민들의 삶은 악화할 대로 악화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리비아는 과거 카다피 시절 국민에게 관대한 복지 혜택을 안겼다. 그러나 정치 불안 속에 유전들이 대부분 문을 닫으면서, 리비아의 유전은 거의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선거 불발 후 자체적으로 총리를 임명해 '두 정부 대립'을 유도한 LNA 측은 유전을 의도적으로 폐쇄하면서 통합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석유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시민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줄었고, 아프리카 최대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연료 부족으로 하루 18시간씩 전기가 끊기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빚어지고 있다.
일부 시위대가 카다피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녹색 깃발을 흔든 것도 이런 이유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물가 급등이 시민들의 인내심을 극단으로 내몰았다.
리비아 전문가인 자렐 하르차우이는 "리비아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급등해 리비아 국민의 극도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도둑정치'가 만연했다"며 "양대 정치세력과 연계된 민병대들은 엄청난 양의 연료를 밀거래해 부를 쌓고 좋은 차와 빌라를 소유했다"고 덧붙였다.
국제사회는 전국으로 확산하는 폭력 사태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유엔과 유럽연합(EU) 특사들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폭력 시위와 관공서 파괴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리처드 노랜드 주리비아 미국 대사도 "모든 정파 지도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외부 세력은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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