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환율 1,300원=경제위기…추경호 "IMF위기 때와 달라"(종합)
고물가에 경기 둔화 조짐…"우리 경제, 스태그플레이션 진행"
미국 긴축에 다른 통화도 약세…"구조적 문제 크지 않아" 시각도
정부, 복합위기 국면 진단…"재정지출의 정밀한 설계 필요"
(세종=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최근 원/달러 환율이 약 13년 만에 1,300원을 돌파하면서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는 과거 환율이 1,300원 이상 올랐던 시기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심각한 국면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1,300원이라는 '빅 피겨'가 깨진 것을 두고 과거와 같은 경제위기의 징후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26일 관계 부처와 금융시장에 따르면 지난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02.8원에 마감해 2009년 7월 13일(1,315.0원) 이후 12년 11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종가 기준 1,300원선을 웃돌았다. 24일에는 전날 종가보다 3.6원 내린 달러당 1,298.2원에 거래를 마쳤다.
시장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350원대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무역수지 적자 등 우려 반영…스태그플레이션 진행"
우리 경제의 심각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고물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5.4% 올라 13년 9개월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실물 경제의 둔화 조짐도 나타나면서 '스태그플레이션'(경제 불황 속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지난 4월 생산·소비·투자가 2년 2개월 만에 동시에 감소했으며 현재 경기를 나타내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두 달 연속 하락했다.
이러한 우려들이 현재의 환율 수준에 녹아있다는 분석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 진행에 따른 실물 경기 악화와 금융시장 불안이 확산하고 있어서 이 부분이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전반적인 우리나라 경제와 기업의 신뢰도 등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점도 불안한 요소로 꼽힌다.
올해 들어 이달 20일까지 무역수지는 154억6천900만달러 적자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할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
코로나19 위기 기간 경기부양 정책 등의 영향으로 통합재정수지는 2019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중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무역수지와 재정수지 모두 적자가 되면서 국가 신인도가 떨어지고 이를 우려한 외국인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 "미국의 이례적 긴축으로 다른 통화도 약세…구조적 문제 크지 않아"
현재의 환율 수준을 근거로 과거의 위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환율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가파른 긴축 때문이라는 이유다.
미국 연준)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28년 만에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엔화 등 다른 나라의 통화도 모두 달러에 대해 약세를 보여 최근의 원화 약세를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의 취약성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지난 24일 기준 8.4% 하락했다. 이 기간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8.5% 올랐다.
원화 가치의 절하율은 같은 기간 일본(-14.6%), 영국(-9.0%) 등보다는 낮고 중국(-4.8%), 대만(-6.9%) 등보다는 높은 수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통화도 다 약세여서 환율만 가지고 위기라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 경기가 둔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위기 국면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수출 등 경기가 뚜렷하게 둔화 국면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위기 국면을 맞는다는 건 이전 금융위기처럼 신용 관련 이벤트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건데, 은행의 건전성과 대기업 상황 등을 고려하면 연쇄적인 부도를 발생시킬 만한 요인이 커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 국채(외평채 5년물 기준)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40bp(1bp=0.01%포인트)대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이는 과거 원/달러 환율이 1,300원에 올랐을 때 CDS 프리미엄이 통상 300bp 이상에서 움직였던 것과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다.
CDS 프리미엄은 채권 부도 시 원금 회수를 보장받는 대가로 채권 보유자가 원금 보장자에게 지급하는 수수료로 수치가 낮을수록 채권 발행자의 신용 위험이 낮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의 대외 신인도가 과거 환율이 1,300원이었던 시기보다는 높은 셈이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도 "IMF 외환위기 때는 우리 기업의 과잉 투자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고 금융위기 때는 미국을 중심으로 금융기관의 부실 문제가 있었다"면서 "현재는 구조적인 부실보다는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문제가 더 커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국 경제 자체에 부실이 많이 쌓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부연했다.
◇ 정부, 복합위기 국면 진단…"재정지출의 정밀한 설계 필요"
정부는 현 상황을 금융시장 불안과 경기둔화가 함께 나타나는 복합위기 국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정책방향 브리핑에서 "주요국 통화 긴축의 가속화 등으로 금융·외환시장 불안도 고조되면서 고물가 속 경기둔화 우려가 확대되는 복합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정부는 최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3.1%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2.2%에서 4.7%로 올렸다.
다만 정부는 최근 환율을 근거로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추 부총리는 이날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IMF 위기 때는 우리 경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미국이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급등시키다 보니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달러 강세가 나타난 것"이라며 "주변국과 큰 흐름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300원 자체를 경제 위기 상황의 증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문제는 고물가·저성장을 극복할 정부의 정책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물가 상승이 주로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이라는 대외 여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는 한계가 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지출로 채무 규모가 확대돼 재정 여력이 크지 않은 가운데 정부 지출은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
정부는 법인세 등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 조치로 재정이나 경제 전체의 선순환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물가로 통화정책이 긴축 기조로 돌아서는 등 올해 정책 환경이 지난해보다 좋지 않다"며 "수출이 어려움을 겪고 내수 소비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며, 투자도 많이 위축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장률을 제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재정밖에 남지 않았다"며 "국가 부채와 물가에 대한 영향 등 여러 제약조건이 있으나, 돈을 많이 안 쓰면서 잠재 성장률을 높일 수 있도록 설계가 잘 된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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