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쟁 100일] 글로벌 경제침체 방아쇠 당겼다
곡창지대 타격에 곡물가격 고공행진…러 제재로 에너지 위기까지
수십년만의 물가상승률에 성장 발목…빈곤국 타격·정치혼란 우려도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이 되면서 세계 경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세계의 곡창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곡물 수출이 줄면서 가격이 급등했고, 러시아가 자국에 대한 제재에 에너지를 무기화했다.
이 '경제 전쟁'의 여파는 무기의 전장인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전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2년여에 걸친 팬데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상황에서 닥친 전쟁으로 전세계 공급망의 혼란이 가중됐고 인플레를 수십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포스트 팬데믹'에 기대했던 경제 성장률도 깎아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 격차가 확대되고 빈곤층은 더 큰 고통을 겪을 우려도 커졌다.
◇ 곡창지대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포탄, 전세계 식량난으로
우크라이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흑토지대로 '유럽의 빵공장'이라고 불릴 만큼 밀, 옥수수, 해바라기씨유 등이 풍부하게 산출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전세계 밀 생산량의 14%를 담당한다. 두 국가의 밀 수출은 전세계 수출량의 29%에 이른다.
두 국가의 해바라기씨유 수출은 전세계 수출량의 75%다. 우크라이나의 옥수수 수출량은 전세계의 16.3%를 맡는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곡물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유엔은 올해 우크라이나 농업 생산량이 예년보다 20%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이미 거둔 곡물조차 수출이 어려워지자 국제가격은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요 수출 통로였던 흑해 항구를 봉쇄하는 바람에 곡물 약 450만t이 컨테이너에 쌓였다.
서방은 러시아가 전세계를 상대로 식량을 인질로 잡고 있다며 봉쇄 해제를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자국에 대한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사이 위기는 세계로 번지고 있다. 레바논, 이집트, 소말리아 등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곡물 의존도가 높은 국가부터 휘청이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곧 아프리카의 굶주림"이라고 지적했다.
전쟁 전에도 기후위기, 팬데믹, 사료·비룟값 인상이 덮친 식량 시장에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자 곡물뿐만 아니라 육류 등 먹거리 전반으로 인플레가 번지고 있다. 각국 정부는 식량안보를 내세워 수출 제한 조치를 내놨고 이는 시장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식량가격지수(FFPI)는 4월 158.5로, 지난해 같은 기간(122.1)보다 30%나 올랐다. 육류는 17%, 밀 등 곡물은 34%, 식물성 기름은 46%나 급등했다.
◇ 제재 맞대응하는 러, 에너지 수출 '빗장'
서방은 러시아에 제재 고삐를 죄고 러시아는 에너지를 무기로 맞대응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달 30일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부분 금지했으며 올해 말까지 90%를 줄일 계획이다.
EU는 전쟁 뒤 5차례 제재를 통해 러시아산 석탄 수입 금지, EU 역내 선박 입항 금지, 러시아 주요 은행과의 거래 중단, 첨단 반도체 수출 금지 등의 조치를 했다.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밸브를 하나씩 잠그며 대응하고 있다.
폴란드, 불가리아, 핀란드에 이어 네덜란드에도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자국이 요구한 루블화 결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들 국가에 공급 중단이 당장 미칠 여파는 크지 않다. 그러나 유럽 다른 나라로 확대하면 심각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닥칠 수 있다.
특히 유럽의 경제 대국인 독일과 이탈리아까지 가스 공급이 끊기면 문제가 커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각각 49%, 46%다.
유럽은 천연가스 수요의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했다.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올해 안에 3분의 1로 줄이고, 이를 미국이나 아프리카로 대체하는 등 수입선을 다변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구매 경쟁이 심화하면서 아시아 등에서의 수급도 불안해지고 가격은 더 오르는 연쇄작용이 우려된다.
원유 가격도 수급 불안으로 가격이 치솟았다. 대러시아 제재 우려로 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해 130달러선까지 넘나들었다.
한국도 휘발유와 경유 가격 모두 L(리터)당 2천원선을 돌파했다.
◇ 팬데믹 끝나가며 살아나려던 성장률 꺾여
고물가 압박에 경제성장률도 꺾이고 있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세계 경기침체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 통계기구 유로스타트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회원국인 유로존의 5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8.1%(속보치)로,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97년 이후 최고치라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미국의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물가지수(CPI)는 3월 8.5%로 40년만에 최대폭을 기록한데 이어 4월엔 8.3%로 집계됐다.
이에 세계은행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4.1%에서 3.2%로 하향했다. 국제금융협회(IIF)도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4.6%에서 2.3%로 내렸다.
팬데믹에 대응해 돈 풀기에 나섰던 주요국은 기준금리 인상 등의 수단을 동원해 서둘러 유동성을 회수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위험이 여전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단시간 내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수습은 쉽지 않아 보인다.
타격은 빈곤국 먼저 덮치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해 가진 정책수단이 많지 않은 이들 국가는 달러화 강세에 따른 수입 가격 상승, 시장 변동성 확대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식량부족, 물가 폭등에 따른 민생고는 정치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 2010년 말 중동·북아프리카에 번진 '아랍의 봄' 역시 식량문제가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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