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에 격분한 우크라인들, 러시아어 버리고 모국어 배운다
동부 피란민 몰려든 서부에 교습소 증가…"저항의 표시로 언어 바꾸고 있어"
(서울=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우크라이나 서부로 피한 실향민들이 고향에서 썼던 러시아어를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를 배우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개전 이후 르비우 등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에는 우크라이나어를 가르치는 교습소가 여기저기 생기고 있다.
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동부에서 살다 서부로 피란한 수백만 명의 실향민들이 우크라이나어를 일상 언어로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인 3명 중 1명은 일상생활에서 러시아어를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많은 인구가 러시아어를 쓰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에서부터 소비에트 연방에 이르는 수 세기 동안 러시아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동부 지역 주민들은 러시아어를 주로 써왔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는 슬라브어로 분류되지만 엄연히 다른 언어다. 수도 키이우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두 언어를 섞어 쓰는 일이 흔한데, 시민들이 두 언어가 모두 쓰이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가능한 일이다.
NYT가 리비우의 한 교습소에서 만난 안나 카찰로바는 "저와 아이들은 이곳에 도착한 순간 우크라이나어만 쓸 것이라고 다짐했다"면서 "지금은 머릿속으로 혼자 말할 때도 우크라이나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키이우의 북동쪽 체르니히우에서 탈출했다는 그는 우크라이나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카찰로바처럼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썼던 피란민 상당수가 러시아의 침공에 격분해 저항의 의미로 언어를 바꾸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다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피란민들이 주로 우크라이나어 배우기에 나서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계층으로까지는 아직 모국어 학습 열풍이 번지지 않았다고 교습소 관계자는 전했다.
우크라이나어 교습소는 전쟁 이후 크게 늘었지만, 사실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은 전쟁 이전부터 있었다.
교습소를 열고 있는 민간단체 '야모바'(Yamova)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에 등장했고, 또 다른 단체 '야디나'(Yadinya)도 같은 해 학교에서 러시아어로 수업을 하는 것에 반발해 등장했다.
야디나를 설립한 나탈리야 페델치코는 "언어를 바꾸는 것은 정체성을 바꾸는 것과 같다"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교습소에서 이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언어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올가 오누치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우크라이나화'를 경험했으며, 특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화에 대한 영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코미디언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어를 쓰면서 자랐지만, 공직에 나서기 전인 2017년에 우크라이나어로 사용 언어를 바꿨다.
그의 지시로 키이우는 2019년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도록 법을 강화했다. 러시아는 침공 전에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탄압을 받고 있다면서 이 법을 지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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